에베소서 1:1-2 (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관계만 중요시 할 위험성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바울은 글을 쓰는 자신과 이 글을 읽는 자들이 모든 것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인 것을 확인합니다. 또한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지만 세상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 물들어 세속화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거룩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의미입니다. 성도는 자신들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임을, 거룩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교회가 세상에 삼켜지기 쉬운 현실 속에서 정체성을 지켜나가며 맡은 임무를 끝까지 잘 감당하기를 바라는 큰 그림을 가지고 인사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야 할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2절에서 바울은 그것을 말합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먼저 은혜는 무엇입니까? 어떤 좋은 것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격과 공로가 나에게 없는데 거저 주어지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은혜라고, 그것을 베푸는 자를 은혜롭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세상에서도 일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어른으로 자라는데 필요한 것들의 상당 부분을 부모로부터 얻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또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다양한 용납과 용서를 얻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물질적 은혜뿐 아니라 잘못과 실수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고 용서를 얻는 도덕적 은혜도 경험합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감사와 겸손을 품는 것이 마땅하지만 죄인은 수많은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자기에게 그것을 누릴 자격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이기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들은 은혜 때문에 더 악하고 뻔뻔한 자가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자는 자기 공로에 대한 만족과 성취에 사로잡혀 있어서 은혜가 자존심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혜에 빚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주의해야 할 거짓된 은혜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이용하기 위해 ‘내가 너한테 이런 은혜를 베풀었으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조종하기 위해 위장된 은혜를 베푸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혜, 거저 베풀어지는 것에 대한 의심을 품도록 가르칩니다.
은혜에 대한 왜곡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의 과정에서 은혜에 대한 의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의심과 반감을 가질 뿐 아니라 자기들끼리 베푸는 은혜에서도 왜곡과 악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닮아서 은혜를 선하게 베풀고 선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뱀, 사탄을 닮아서 위장된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의심하거나 악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포함한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동기로 진실하고 선하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에 합당하게 겸손과 감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즐거워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은혜는 그것을 받는 자가 베푸는 자의 다스림 아래 들어가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그 은혜의 속성을 가지고 악용하지만, 미끼로 삼지만, 착취하지만 하나님은 그 은혜의 속성을 가지고 우리를 선하게 다스리길 원하셨습니다. 은혜에 의한 다스림을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의존하여 복을 얻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세상은 그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평강, 다른 말로 평화는 무엇입니까? 평화는 불안이나 다툼이나 전쟁이 없는 상태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 사이의 평화, 나라들끼리의 평화를 크게 여기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의심하고 거절하고 하나님에게서 떠났으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반역하는 죄인들에게 진노를 품으시고 저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려 하지만 결코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우리는 자기 내면의 평화도 잃어버렸습니다. 죄를 저지른 자의 양심은 평화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내면은 자신의 죄로 인해 불편해진 양심을 죽이고, 죄에 대해 이유가 있었다고 핑계를 대거나 원인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느라 피곤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선하다는 느낌을 잃지 않으려고 위선을 드러내느라 분열되어 있습니다. 한 인간의 내면과 인격이 정돈되어 있지 않고 분열되어 있으니 당연히 그런 죄인들끼리의 관계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집단이든 나라든 서로 싸우고 빼앗고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첫 가정에서부터 살인이 있었고, 가인의 후손들은 전쟁을 위해 발전했습니다. 성경이 아닌 일반 역사도 그것을 증명합니다. 부족 사회에서 현대 국가로 발전하기까지 셀 수도 없는 약탈과 살육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역사상 잠깐 있었던 평화의 시기들은 강력한 나라가 등장해서 힘으로 만들어낸 평화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평화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무기가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공포심으로 유지되는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힘으로 눌러서 만드는 위장된 평화, 거짓 평화입니다.
이렇게 타락 이후 세상에는 참된 은혜와 참된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하게 여기고 다스림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 없으니 평화도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회복하려면 먼저 은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원인이고 평화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회복되는 방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거절당하신 하나님, 우리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은혜가 주어지고, 평화도 주어집니다.
이 세상은 은혜와 평화를 원하는 것 같지만 참된 은혜와 참된 평화를 원하지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은혜의 개념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내가 낸 돈보다 음식이 괜찮게 나오는 식당은 ‘은혜로운 가성비’라고 말하고, 가난한 자에게 금전을 베풀거나 실수나 범죄를 용서해주는 정도가 은혜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가 왜 필요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무거움과 그 크기를 알아야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죄에 대한 자각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성령께서 죄인의 양심을 일깨우시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알게 하시고, 그런 두려운 일들에서 건지시는 구원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믿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피조물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최고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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