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기쁨을 누리는 관계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라고 말하듯, 또 하박국 3장 17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말하듯, 우리는 세상 어떤 것보다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여호와는 우리를 통해 기쁨을 얻으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7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을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속량 곧 죄사함’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죄사함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죄사함, 죄의 처리, 죄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당하셔야 할 만큼 크고 심각합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힘센 육식 동물들이 약한 동물들을 잡아먹을 때 분노하지 않습니다. 또 가끔 반려견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도 그 주인이나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길 뿐 그런 일을 저지른 동물에 대해 진노를 품거나 죄를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심어주신 양심 때문에 죄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죄책감을 느끼고, 또 악한 자들에 대해 사람들은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지 잘 알지 못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크고 영원한 진노는 합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생명들과 달리 인간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기대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실패와 반역에 대해 크게 진노하십니다. 사람의 존귀함, 피조 세계에서의 사람의 위치, 맡겨진 임무가 막중한 만큼 하나님의 기대와 진노도 큽니다. 우리가 극악한 범죄자에게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기 징역을 내리는 것 이상으로, 영원하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영원한 진노를 품으시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큰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 아들의 피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편에서 쉽게 용서하시거나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피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죄를 짓거나 손해를 끼쳤을 때 완전한 화해와 보상을 하려면 희생당하거나 손해를 입은 것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어떤 물건을 망가뜨렸으면 동일한 물건을 가져와야 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죽게 했으면 살려내는 방법만인 진정한 회복입니다. 죄인인 우리 죄가 해결되려면 죄가 없으면서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완전한 인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죄인에게는 그런 능력이나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아들만이 죄를 범한 인간의 가치에 대응할 수 있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정직하게 대신 다 겪을 수 있습니다. 또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치시려고 율법을 통해 동물 제사로 죄를 처리하는 것을 실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귀하고 흠 없는 짐승이라도, 또 아무리 평생에 걸쳐 계속해서 동물을 제물로 바쳐도 죄인의 허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직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신 분이 대신 죽임당하셔서 제물이 되셔야 하나님의 진노가 해결될 수 있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아들의 피라는 표현으로 압축했습니다.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과 진노가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로 회복되기를 소망하는 자는 내 죄를 대신 지신 아들의 십자가에서 무한한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폭로하는 두려운 사형틀인 동시에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아들을 희생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은혜로운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벼운 사랑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무거운 참회 없이 그냥 얻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비참하게 죽임당해야 할만큼 우리의 죄는 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 흘려진 아들의 피 때문에 살게 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자기 죄에 대한 정직한 깨달음 없이 성급하게 은혜를 누리려고 십자가를 쉽게 지나치고 부활만을 중요하게 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죄를 다 해결하셨으니 신자는 부활이 주는 생명과 자유만 누리면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가장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임당하셔야 했는가를 충분하게 알지 못한다면 부활의 기쁨은 단지 영원한 삶에 대한 욕심,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실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구원이 다른 방법이 아닌 아들의 피흘림으로 베풀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신 동시에 거룩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말한대로 은혜가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온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속량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바울이 속량 곧 죄사함이라고 말한 것은 그 두 가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 의미가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평민,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는 설명 때문에 우리를 물건 취급하시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시대에 시민이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자신의 자녀처럼 삼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 노예를 선한 주인이 자기 돈을 지불해서 자유인처럼 복을 얻게 하는 은혜 베푸는 것입니다. 즉 죄인인 인간은 사탄의 종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핏값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십니다. 전에는 우리 주인이 사탄이었지만, 구원받은 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전에는 우리를 속이면서 학대하는 사탄을 섬기며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신 고난당하신 참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노예를 아들들로 삼아주시는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사서 소유권을 주장하신다는 설명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피조물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해줘야지 왜 자기에게 묶이도록 하느냐고 불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권위와 다스림들이 죄에 오염되어 있어서 억압과 학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과 달리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소유, 다스림 아래 두시는 것은 우리를 가장 행복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아무것도 제한하는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제한과 질서들이 정확하게 갖춰저 작동하는 다스림 아래서 보장되는 것입니다. 마치 나는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누리겠다고 하면서 집을 나가거나, 생존할 능력도 없이 중력도 산소도 없는 지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나 나라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질서나 법도 없는 세상에서 산다면 그곳이 지옥입니다. 나를 안전하고 든든하게 유지해주는 자연 질서와 나라와 법 아래 속해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복된 지배자,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이시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복된 다스림, 지배 아래에서 우리가 복을 누리도록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셔서 우리를 다시 사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한 ‘죄, 그의 피, 속량’이라는 표현과 그 개념들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질 만한 것들입니다. 우리 시대는 잘못과 죄에 대한 지적을 학대라고 말합니다. 죗값을 치르는 데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잔인하다고 여기고, 구원받는 것이 내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을 속박이라고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연약하고 비참한 죄인인 것을 모르면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이시기에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닌 우리를 위해 고통을 몸소 겪는 사랑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보이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렇게 하셔야 했을 만큼 우리의 죄가 큽니다. 사람들은 죄와 피와 속량을 원시적이고, 끔찍하고, 인간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만듭니다. 죄를 무섭게 드러내고, 피흘림으로 죄를 처리하고, 종을 값을 주고 사서 자기 자녀로 삼는 이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과 능력과 지혜가 드러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무거움을 지셨고, 피흘리셨고, 자신을 낮춰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종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베소서 강해 11 에베소서 1:10-14 (0) | 2023.11.12 |
---|---|
에베소서 강해 10 에베소서 1:1-9 (0) | 2023.11.05 |
에베소서 강해 8 에베소서 1:1-6 (0) | 2023.10.22 |
에베소서 강해 7 에베소서 1:1-4 (2) (0) | 2023.10.15 |
에베소서 강해 6 에베소서 1:1-4 (1) (0) | 2023.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