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11-18 (3)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현재 이스라엘과 중동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 참상들의 원인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단기간에 형성된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거리감은 이스라엘 성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성소, 성소 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공간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누가 접근할 수 있느냐에 따라 구역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성소 바로 바깥은 제사장의 뜰이었고, 그것의 동쪽은 이스라엘의 뜰이었고, 거기서 더 동쪽은 여자들의 뜰이었고, 그곳까지를 둘러싸고 있는 벽 바깥이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역사적 자료들에 따르면 거기엔 이방인들이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누렸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반대로 신약시대에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사실에 유대인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9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는 신명기 32장 2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일에 실패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보며 자신들도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야 했는데 그렇기보다 할례와 정결법을 계속 강조하면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일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한쪽은 교만하고, 한쪽은 소외감으로 시기하는 일이 지속되는 중에 그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등의 골이 깊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가 되게 하셨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서로 멀리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14절에서 막힌 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무너뜨려졌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분열된 관계의 화해, 전쟁 중인 나라의 평화를 추구할 때 서로 간의 공통점을 내세우거나 양보와 협의를 하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죽임당한 것으로 이뤄졌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 방법은 모든 인간들의 갈등과 분열에 있어 유일한 근본적 해결책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갈등, 분열은 다 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불화와 저주를 일으켰고, 사람들끼리의 갈등과 폭력을 일으키고, 창조 세계와의 갈등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갈등과 불화가 단지 사람의 노력이나 개선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만 풀리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시고 피흘리고 죽임당하신 일이 사람 사이의 막힌 담, 불화를 해결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해결된 일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다른 사람들과의 불화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은 폐기처분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고, 종료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도덕법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거룩함을 외형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제사법, 정결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지만 그것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예수님이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죽임당하실 것을 예고하는 제사법과 거룩한 삶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을 가르친 정결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고, 종료되었습니다. 참 제물인 예수님이 죽으셨고, 사람을 속에서부터 바꾸는 성령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율법을 완성하셨지만 성도인 우리는 율법에 있는 도덕법은 지켜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도덕법을 지켜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지켰던 할례, 정결한 음식을 먹는 것, 정결하기 위해 지켰던 규례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 효과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고, 성령께서 성도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이미 거룩하고, 또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할례나 정결예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더 낫다고,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자랑과 교만 때문에, 죄 때문에 평화가 깨지는데,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믿음을 통해 구원 얻게 하셔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사람의 노력이나 변화, 성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죽고 다시 살아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 새 사람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망할 세상 가운데 살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은 각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인간들은 죄 가운데서 각자 자기 자랑과 자기 주장을 하다가 불화를 일으키는데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는 구원을 받게 하시고, 또 오직 그리스도만 높이는 교회의 지체들이 되게 하셔서 평화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속하게 하셔서 지으셨다고, 다시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기 노력과 변화, 성장이 아닌 재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 하와를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산 자들만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다른 성도들과도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또 16절이 말하는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사탄의 주도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만 무력화시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깨는 자기 배경, 자기 성취, 자기 자랑도 다 무력화시키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인 동시에 믿음 있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자가 평화를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그 본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죽여야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고 교회의 평화도 이룰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그것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단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성찬을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와 살을 먹은 자답게 자신을 따르라고, 죽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자랑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고 로마인이고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과한 자들의 평화, 막힌 담이 제거된 자들의 평화를 누리는 비결입니다. 자기 선택과 노력이 아닌 단지 속해서 복을 누리는 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아들 안에서 함께 죽이셨다가 다시 살리셔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게 하셔서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이 세상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그래서 힘으로 만들어내는 평화이고, 자기 자랑과 자기도취를 위한 것이고, 기껏 얻은 평화로 쾌락과 문란함을 즐깁니다. 로마가 자신들의 힘으로 평화를 유지할 때 그들의 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생겨난 대형 경기장, 군중 스포츠 문화가 왜 생겨났습니까? 우리나라에 대형 체육관과 프로구단이 왜 군사독재 정부 때 생겨났을까요? 그것들에 공동체, 인류의 화합과 평화적 축제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지배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감을 해소해서 억지로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한 쪽에서는 힘, 폭력을 사용하고 한쪽에서는 쾌락을 즐기게 해서 통치하기에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롱하는 평화를 조장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이 희생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서로 자기 자랑, 자기 주장을 하며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하게 만드심으로, 자랑하던 입들이 침묵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절대적인 공통점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베소서 강해 33 에베소서 2:14-22 (2) (0) | 2024.04.21 |
---|---|
에베소서 강해 32 에베소서 2:14-22 (1) (0) | 2024.04.14 |
에베소서 강해 30 에베소서 2:11-18 (2) (0) | 2024.03.31 |
에베소서 강해 29 에베소서 2:11-18 (1) (0) | 2024.03.24 |
에베소서 강해 28 에베소서 2:8-10 (4) (0) | 2024.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