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죄에 관하여 (1) 창세기 4:6-7

따뜻한 진리 2024. 5. 5. 19:58

죄에 관하여 (1) 창세기 4:6-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오늘부터 당분간 우리가 함께 나눌 주제는 죄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죄에 대해 엄청난 관심과 반응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남의 죄에 대해서만 그렇습니다. 범죄자의 죄, 정치인의 뻔뻔함, 좋은 이미지를 보여왔던 연예인의 범죄 등에 몰입해서 우리는 실망이나 분노를 느끼며 죄에 대한 자신의 정의감을 표출합니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런 일이 더 흔해지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에 대해서는 점점 더 무지하고, 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 시대는 죄 자체를 부정하고, 죄에 대한 책임회피를 뒷받침하는 여러 도구들에 속고 있습니다. 현대철학,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정신의학과 심리상담에 의해 우리의 죄는 치명적이고, 무겁게 다뤄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수, 질병, 미성숙으로 미화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피해자라고 변호해줍니다. 그래서 어떤 범죄자들은 자신이 술을 마시고 저지른 일이라고, 정신과 치료 이력이 있다고, 자기는 미성년자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려고 합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죄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기 전 잠깐 슬퍼하면서 자신이 구원자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인정할 때만 사용되고는 더 이상 잘 다뤄지지 않습니다. 성도가 죄를 진지하게 계속 살피는 것은 어둡고 무거운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받기 쉽습니다. 그런 주제를 다루는 것은 활기차고 진취적이어야 하는 교회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랑과 은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다보면 자연히 죄는 멀어진다고 속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남들에게 감화를 주는 성숙한 삶을 살아도 죄는 그 헌신의 과정에서나 성취의 순간에 끊임없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는 역사 속 어떤 시대보다 죄에 대해 무지하고, 그로 인한 거짓된 구원의 확신과 거짓된 감격과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는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은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끼리만 부끄러움을 가리고 문제 삼지 않으면 된다고, 또 하나님에게서 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또 가인이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해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대충 덮고는 하나님께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차별과 고통을 겪었으니 이런 죄를 즐기고 지속하는 것이 보상이고 권리라고 생각하고, 이런 나를 긍정적으로 봐줘야 한다는 것으로 자기 위로를 할 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그것을 기대하고, 하나님에게도 주장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은 죄를 정직하게 다루며 하나님을 인정하기보다 자아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속인 채 죄를 즐기는 것은 참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가치를 가장 잘 누리기 위해서 우리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얼마나 고귀했는지, 그러나 어떻게 망가진 상태가 되어 지금의 나가 된 것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 현재 알면서도, 또 모른 채 즐기는 죄들에 대해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우리는 많은 착각을 합니다. 자기를 망치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죄의 노예로 행하는 것인데 자유라고 착각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와 상관없어진 것이 아니라 드디어 본격적으로 죄를 깨닫고 죄와 싸우고, 죄를 처리하는 것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가 되었어도 부단히 죄를 분별하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를 속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지적받는 것이 없다고, 별문제가 없다고 안심할 뿐입니다. 그렇게 죄 분별과 싸움이 없는 삶은 참된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죄를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 나라 모형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성도의 삶,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잘 분별하고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성막제도 안에서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자기 대신 피흘리는 짐숭을 통해 자기 죄에 대해 확인하고. 처리해야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경험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원받았으니 죄 문제를 더 이상 건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 아니라 선택받아 구원 얻었기 때문에 비로소 죄를 바르게 볼 수 있고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제사보다 더 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다루며 더 큰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더 본격적으로 죄를 다뤄야 한다는 원리는 구약에서 발견될 뿐 아니라 예수님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시면서 몸이 깨끗해진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것은 구원받은 자에게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주기도문을 통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것은 성도가 끊임없이 죄의 유혹과 위험을 겪을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또 성찬을 기념하게 하신 것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님의 보혈 공로가 필요한 자들임을 기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피흘리신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이고,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임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으로 죄에 대한 책임과 처벌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됐지만, 죄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어도 완성의 때까지 계속 죄와 싸우면서 살아갑니다. 구원 전에는 죄를 즐겼지만, 구원 받은 후에는 죄와 싸우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그런 죄와의 싸움을 허락하셨습니다. 죄와 은혜는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와의 씨름을 남겨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은혜를 값지게 여기고, 하나님께 의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죄를 해결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감사하게 하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또 죄를 분별하고 거룩을 추구하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바르고 풍성하게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빛이 분명히 드러나듯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어두운 인간의 죄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성경의 교리들을 배우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죄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사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왜 필요하고, 은혜이고, 능력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죄의 교리는 우리가 깊숙히 끊임없이 활동하는 죄를 인식하고, 항상 깨어 그것을 경계하고, 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취약함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겸손한 태도로 부지런히 하나님을 의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