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죄에 관하여 (2) 로마서 5:12-14

따뜻한 진리 2024. 5. 12. 19:37

죄에 관하여 (2) 로마서 5:12-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 세상은 우리가 왜 죄성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라는 과학자가 생물이 가진 생존 본능, 즉 유전자가 자기를 복제해서 세상에 퍼지려는 본능, 경쟁심에 의해 인간의 이기성, 죄성을 유발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설명은 그런 유전자의 본성을 신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인간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또 다른 종교성을 드러낼 뿐입니다. 사람이 왜 죄인이 되었는지는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사람의 죄에 대해 바르게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성경뿐입니다. 창세기가 알려주듯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을 통해서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해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은 타락한 상태를 살아가는, 죄인이어서 죄를 짓고 사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참혹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이 큰 문제가 없다고, 나의 상태와 행위에 대해 괜찮다고 여기고 있다면 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가 건강하다고 여기는 자에게 의사가 필요 없듯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가 악한 죄인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자신은 그럭저럭 괜찮다고, 크게 문제가 없다고, 악한 죄인은 아니라고 착각하게 하는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하나는 죄가 죄인인 나를 어두운 상태로 무지하게 만들고, 핑계를 하게 만들기 때문에 죄인인 나의 실체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죄인들에게 둘러싸여 있기에 나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주변을 둘러싼 것들이 악하기에 자신도 정상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당연하고,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미개하고, 부도덕하고, 착각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 다른 가정, 다른 지역, 다른 나라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깨끗하게 정리를 잘하고 사는 다른 집에 방문해보면 우리 집이 얼마나 정리를 안 하고 지저분하게 사는지 알게 됩니다. 똥, 오줌을 아무 곳에서나 해결하고 생활하수를 하천에 그냥 흘려보내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 지하에 복잡한 하수관이 깔려 있고, 수세식 변기가 있는 나라를 여행하고 다시 돌아간다면 자신이 사는 환경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고, 비위생적인지 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험한 말과 도둑질과 폭력이 흔한 나라에 살던 사람이 교양과 도덕과 질서 수준이 높은 나라를 경험하면 비로소 자신의 삶이 죄악 덩어리였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가 없는 존재나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라도 말했고,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충격을 받아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죄인의 비참함을 알기 위해서 아담이 죄인이 아니었던 때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됩니다. 가난하고 병든 거지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그 사람의 비참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 사람이 그런 상태가 되기 전 어떤 위치와 상태에서 무엇을 누렸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현재의 비참함이 더욱더 비극적이고 안타깝게 여겨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담이 아직 죄를 짓지 아니한 때, 그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안다면 그가 죄인인 된 것, 또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의 비참함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우리의 머리인 아담은 원래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왕, 제사장, 선지자였습니다. 먼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삼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처럼, 우리 사람처럼 생기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영혼과 몸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고, 다른 생명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어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담은 그 존재, 살아서 거기 있음 자체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 하는 일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담은 자신도 생명을 낳아 하나님이 생명을 낳으시는 근원이심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창세기 5장 3절을 보면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말힙니다. 이것은 1장 26-27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모양,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반복해서 하나님의 인간 창조하신 일을 아담도 유사하게 반복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아담은 아들이었습니다. 그것을 고백하기 위해 아담도 아들을 낳아 아버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피조물의 수준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들들, 자녀들로 여기셨습니다.

 

     신명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은 새끼를 보호하고 키우는 독수리로 묘사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화나게 한 자녀들로 묘사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처럼 아담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 아들이었습니다. 호세아 7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나 이스라엘에게 동일하게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기대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에베소서 1장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 자녀들이 되는 것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녀가 그 부모의 생김새만 닮는 것이 아니라 하는 말투와 행동과 삶의 양식까지 닮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아담에게 주어진 운명,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니, 아담은 이 세상 어떤 대단한 아버지를 둔 자녀보다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참 아버지로서 존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했다면 예수님이 탕자 비유 속에서 말씀하신 아버지가 했던 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담은 하나님의 풍성하고 영원한 복을 자녀로서 누릴 수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성공한 아버지를 둔 자녀가 사람들의 주목을 함께 받고 영광을 얻게 되듯, 아담도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을 닮는 것, 따라 하는 것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듯 아담은 하나님을 닮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도 영광스러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 아니라 사탄을 따르고 사탄을 닮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진 아내 하와를 따라 선악과를 먹고 반역하게 됩니다. 아담은 단 한 번 사탄을 따른 것이 아니라, 사탄을 따르고 본받는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지옥을 향해 가는 사탄을 닮아 함께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담과 그 후손들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리고 살면서도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탄과 함께 지옥에 던져질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쏟고 사는 것이 아담의 후손들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어떤 피조물보다 영광스러운 위치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자기 존재를 기뻐하고, 또한 다른 하나님의 형상들을 낳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더 확장하는 기쁨을 자녀들과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미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형상들인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의 죄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괴로워해야 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 인생을 저주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 희망이 없고 고통이 예상되기에 자기를 닮은 자녀를 낳는 일도 회피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동물보다 못한, 차라리 개와 고양이를 선호하는 상태로 전락한 것입니다. 끝없는 욕망 때문에 기계와 인공지능이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뭔가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일을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여러 불안과 고독과 상처와 고생과 질병과 죽음과 허무함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아담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뿐 아니라 우리 모두까지 비참한 상태가 된 것은 절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첫 아담의 실패는 둘째 아담, 하나님의 참 아들 예수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가 죄인이 된 이 큰 격차, 죄인의 바닥에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니, 아담의 영광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 지금 처한 세상의 고통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원의 필요성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해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왜 구원이 필요한지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아담이 죄인으로 추락한 그 비참함의 그 크기, 큰 격차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참 하나님이 죄는 없으시지만 자발적으로 죄를 짊어지셔서 낮아지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복을 영원히 누리던 분이 이 땅의 죄인처럼 되셔서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원래 보여야 할 참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위치에서 죄인의 상태가 된 것 그 큰 격차를 모른다고 발뺌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악과 고통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형상들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