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관하여 (8) 롬8:7-8; 요15: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의 지정의는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이지, 지성은 참 빛, 참 지혜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싫어하니 어리석게 되었고, 감정은 헛된 것에 감동을 받아 거짓에 속기 쉽게 만듭니다. 계속해서 이 시간에는 지정의 중에서 마지막인 의, 의지의 오염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의지는 무엇입니까? 의지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서 무엇인가를 하려는 능력입니다. 동물에게도 의지가 있지만 사람의 의지와는 많이 다릅니다. 어떤 존재에게 의지가 있다고 말하려면 자기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고, ‘나’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는 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왜 존재하나, 나는 자유로운가, 나는 왜 이런 상태인가를 자기에게 질문하고, 더 나은 상태로의 추구, 바람이 있어야 자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의식을 가지고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그런 자의식이 없습니다. 또 사람의 조종으로 작동하는 로봇은 능력은 있지만 자의식이 없으니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고로 온몸이 마비되어서, 얼굴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자의식이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서라고 자신과 세상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면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의지가 있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그런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자발적으로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의지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마치 물고기가 바다를 벗어나 자유롭겠다고 착각이라도 하듯 죄인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에 대해 반항할 뿐 아니라 모든 권위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타락한 의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이 때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반항합니다. 고집을 부립니다. 왜 자신이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할 수 없는, 지성이 발달하지 않은 어린 아이인데 본능적으로 반항합니다. 부모가 가장 선한 것을 제시하고 따르기를 바라지만 아이는 어리석은 반대와 고집을 부립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의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의 의지는 자유, 책임과 함께 갑니다. 먼저 의지와 자유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감옥에 있는 죄수나 노예는 자기 의지대로 마음껏 생각할 자유는 있지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의지를 발휘할 자유는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자유를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자유를 누리는 방향으로 의지를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자유를 누리겠다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경제적 자유를 누리겠다고 빨리 부자가 되려 하는데, 막상 그 자유를 가졌을 때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잘 보면 노예가 됩니다. 기껏 어른이 되어서 누린다는 자유가 술, 담배,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경제적 자유를 얻어서 하는 일이 돈을 지키기 위해 벌벌 떨며 돈의 노예가 되거나 가진 것으로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물건 파는 기업들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은 진정 자신의 선을 위해 자유를 사용할 의지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의지와 책임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의지가 없는 로봇은 사고를 내도 책임이 없지만 자기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인간은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발휘한 책임을 져야 하는데, 무책임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의지에 대한 자유는 더 많이 확보하려고 투쟁하면서 책임은 회피합니다. 술 때문에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정신질환이 있어서 나의 의지와 상관이 없었다고, 내가 자라온 환경과 부모의 잘못된 태도가 나를 악하게 만들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아무리 악한 환경 속에 있었어도 의지적으로 선하게 반응하고, 선하게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악에 대해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측은한 자인 것처럼 속입니다. 다른 사람의 강압과 환경에 의해서 행한 것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의지에 대한 태도입니다.
또 우리의 의지가 죄로 부패하고 무능한 것은 게으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의지가 가장 열심히 발휘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자기 지성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채우는 일, 감정을 평온하게 지키는 일, 경건을 추구하는 일, 공예배를 준비하는 일, 예배당에 나오는 일, 예배 순서에 온 힘을 쏟는 일에는 게으릅니다. 싫증을 냅니다. 졸기도 합니다. 그러나 악한 일에는 부지런합니다. 쾌락을 위하는 일, 낭비하는 일,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합니다.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일, 자랑하는 일, 교만한 마음을 채우는 일에는 열심을 냅니다. 쾌락적인 일에는 피곤을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자석의 같은 극과 같이 밀쳐내려 하고, 악한 일은 자석의 다른 극과 같이 열심히 끌어당깁니다. 타락한 의지는 하나님의 진리를 감옥에 가두기 위해 다른 헛된 지식으로 ‘내가 똑똑하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우월함을 위해 지성을 사용합니다. 또 하나님이 남겨 주신 양심이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호소할 때 죄인의 의지는 그 양심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헛된 것에 흥분하도록 감정을 사용하게 합니다. 타락한 의지가 지성과 감정을 마비시킵니다. 또 죄인의 의지는 여호와의 율법은 무겁다고, 부당하다고 팽개치면서 사탄의 속임수는 좋다고 짊어집니다. 죄인의 의지는 신랑이신 예수님은 버리고, 자신을 망하게 하는 음녀는 끌어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한 의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살고, 남을 돕고, 세상을 살만한 곳이 되게 하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상관없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도록 가르치고, 격려해야 합니다. 선한 의지를 실천하는 것을 칭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영혼과 이 세상이 진정 복되게 될 수는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래 우리의 의지는 어떠해야 합니까? 지난 시간 언급했듯이 우리의 지정의 중에서 지성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 총명해지고, 감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에 감화되어 뜨거워지고 의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지정의 모두 죄로 오염된 인간은 그런 일에 무능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안에서는 그런 회복이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바르게 작동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그 의지를 사용해서 자신의 지성, 머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일에 힘쓰게 하고, 자신의 감정이 계속 식지 않도록 노력하는 선순환을 일으켜야 합니다. 뇌의 명령과 심장이 보낸 피에 의해 근육과 뼈가 움직이지만 다시 근육과 뼈의 움직임으로 음식을 먹어, 그 영양분으로 뇌와 심장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지정의는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성과 감정에 의해 의지가 움직여야 하지만 반대로 지성과 감정이 경건하도록, 깨어있도록, 죄와 싸우도록 의지가 일깨우고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의지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지정의의 작동이 마음의 본래 활동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이 그런 일에 무능해졌다고 말합니다. 죄인 의지는 죽어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야만 저정의의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지의 가장 선한 사용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음을 만끽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죄 아래서는 우리의 의지는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 의지는 단지 죄의 노예 역할을 할 뿐입니다. 무엇을 하든 죄를 짓는 일에 의지를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지성과 감정을 복종시키는 일에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야 우리에게 자유가 보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존하여 살고, 그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죄를 향해 기울어져 있고, 죄에 이끌리는 우리의 의지를 해방 시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5장 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과 무관한 죄인은 아무리 자발적인 의지, 나름대로 착한 의도, 부지런하고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노력한다 해도 하나님이 좋게 여기실 선한 결과를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해결하는 일, 자기 영혼을 살리는 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을 자기 의지로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날 때, 성령이 주시는 의지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열매, 영원한 복이 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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