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관하여 (7) 창6:5-7; 마11:16-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요즘 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부터는 우리의 지정의가 죄로 인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지, 즉 이성과 지혜가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똑똑한 줄 알지만 무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복되고 선한 것을 알려 하기보다 악한 것을 잘 배우고, 거짓에 속아서 사는 것이 인간의 지성입니다.
이 시간에는 지정의의 두 번째 것인 정이 죄로 인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필 것입니다. 그런데 정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정에 해당하는 정신, 감정, 심리, 마음 등의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몸의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또 심리적 문제의 상당 부분을 정신과적 약물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정은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몸이 아닌 내면의 정신적, 감정적인 현상들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로 오늘 내용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이 마음이라는 용어를 지정의를 모두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창6:5) 있기 때문에 혼동될 수 있어서 이 시간에는 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본래 사람의 감정은 이지, 지성에 의해 통제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지정의 이 순서에 따라 지배되는 삶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시라는 분명한 이 사실이 우리의 지성을 가득 채우면, 다음으로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과 든든함과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고,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실천되는 것이 본래 창조된 인간의 지정의의 역할이었습니다. 즉 절대적이신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에 의해 사람의 감정이 생겨나고, 그 감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을 기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의지에 연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이성의 종 역할을 해야 했던 감정이 이제 주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성이 죄로 오염되어 절대적인 지식, 보편적인 법, 그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으니 감정을 통솔할 근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꾸로 이성이 감정에 의해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는 현대로 오면서 신, 절대적인 것, 보편적인 도덕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며 무너뜨렸습니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지식은 점점 오직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일 뿐 참 지식은 버렸습니다.자신이 신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곧 법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타락한 감정과 그 감정대로 행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성은 이제 감정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한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보조적인 역할로 전락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감정을 소유할 수 있는데 죄인은 그럴 수 없으니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한다 해도 자기 사랑, 자기 숭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타락한 사람의 감정도 여전히 선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선하신 분임을 아는 지식에 의해 감화된 감정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즐기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선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남을 도와줌으로써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터 싱어라는 철학자는 선행을 통해 우리의 행복감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가능한 조금씩 여러 군데 나눠줘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선행을 하는 우리의 감정마저 부패했으니 선행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그런 감정을 자극하고, 격려해서라도 선행을 장려해야 합니다.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선을 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죄인의 감정이 느끼는 선이 진정한 선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행위와 행복감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숭배되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라면 자기 안에 있는 그런 감정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부패한 감정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말하자면 ‘공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공감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 상대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것으로써 우리가 더불어 살기 위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감정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감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고, 공감 능력, 공감 대화, 사회적 공감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 왔습니다. 공감 능력이 인생을 성공하게 하고, 사이코패스들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공감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공감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반성이 제기되었습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줘야 하는데 부모들이 “-그랬구나”라는 대화법으로 자기 자녀의 감정을 지지해주는 방법에만 일관해서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강화시켰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 사회적, 집단적 공감 능력이 잘 계발될수록 선동당하기 쉽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 어떤 범죄자가 잘못할 수밖에 없었던 여건에 사람들이 공감하게 해서 선처를 바라는 여론을 형성시키고, 어떤 범죄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여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선동에 의해 히틀러는 독일 국민은 피해자이고 유대인들은 가해자라고 인식시켜 홀로코스트라는 비참한 일에 참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선전, 선동에 의해 기업들이 물건을 팔아 돈을 벌고, 부도덕한 지도자들이 지지를 받아 권력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감 능력을 대단히 좋은 것으로 높이지만 그 공감 능력은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겨 복수와 증오심을 발휘하도록 이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들 역시 사람의 부패한 감정을 이용합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각 사람 가운데 효과적인 사역을 하실 것을 바라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바른 복음, 성경 전체 내용과 교리를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손쉽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사용해왔습니다. 카톨릭은 미술과 건축을 이용해서 종교적 감정을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빛과 색채와 섬세함과 압도적인 규모를 통해 신비감, 경외심을 유발시켰습니다. 현대 기독교는 다양한 악기와 무대 예술을 이용한 찬양 집회를 통해 종교적 감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잘못된 기도로 신비체험을 가르칩니다. 울고 웃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또 심리학을 이용해 상한 감정을 치유하고, 자존감을 높이고, 긍정적인 기분을 들게 해서 하나님이 내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모두 체험, 감정을 가지고 접근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바른 사역보다 감정을 조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신자가 신앙을 갖게 되고 유지하는데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 사용될 때 교회는 사람들을 속이게 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인데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고, 구원받았다고, 은혜 안에 산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물론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성도와 교회도 미술과 음악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신앙상담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에도 감정의 변화 체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부패한 감정은 하나님의 은혜와 체험도 왜곡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 앎이 가장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로 부패한 감정과 내가 체험한 것이 우선시 됩니다. 이지가 아닌 감정, 성경이 아닌 나의 느낌, 하나님이 아닌 내가 우선시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죄로 부패했으니 감정을 무시한 채 냉담하고 메마른 신앙생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성도는 신령한 감정, 정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도덕적 완전성과 아버지 되심과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구원을 보장하신 사실에 의해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분명한 사실과 진리를 근거로 생겨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을 고백하면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던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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