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죄에 관하여 (9) 딤전 1:19, 히 10:22

따뜻한 진리 2024. 6. 30. 22:38

죄에 관하여 (9) 딤전 1:19; 히 10:2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죄에 대해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를 알기 위해 아담이 원래 누려야 했던 영광에 대해 살폈고, 그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하나님의 법, 즉 십계명을 어긴 것이고, 그가 범죄를 저지른 책임, 죄책이 아담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도 전가되어 죽음과 수치와 고통을 겪게 된 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우리에게 어떤 실제적인 문제를 일으켜서 반하나님적이고 어리석고 악한 삶을 살게 하는지 깨닫기 위해 지정의에 대해 살펴본 것입니다. 이어서 이 시간에는 양심에 대해 함께 생각해봅시다.

 

     양심은 어떤 행동에 대해 선과 악이라고 의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악은 벌을 받아야 하고, 선은 칭찬받아야 한다는 판단이 양심에서 비롯됩니다. 양심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갖는, 선험적인 기능이냐 아니면 경험에 의해 생기는 후천적인 기능이냐를 가지고 논쟁이 있었지만 우리는 양심이 하나님이 주신 선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정의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양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이 있기에 때로 다른 사람이 지적하기 전 나의 잘못을 인식하고 불편함이나 죄책감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 죄책감이 없는 자들에게 ‘양심도 없다’는 분노를 하며 인간이라면 양심이 어떤 수준으로 작동했어야 한다는 책임을 묻습니다. 즉 사람들은 양심이 모든 인간들에게 있는 기능,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은 자신을 살피고 반성하는 능력으로써 모든 인간의 도덕성의 바탕이 됩니다. 신학자들은 이 양심에 대해 말해왔고, 특히 청교도들은 이 양심을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청교도들은 양심을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정탐꾼이라고 칭했습니다. 본래 양심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죄를 경계하고, 하나님께 피하도록 해야 하지만 아담이 범죄한 후 양심은 그럴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양심은 선과 악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이 죄지은 것에 대해 두려워하게 만들고, 심판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무서운 일이 일어나면 신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죄에 대해 양심이 비명을 지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을 보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라도 양심이 율법이 된다고 말합니다. 즉 양심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판단자이신 것을 잊지 않도록 자극합니다. 그러나 양심은 오염되어 있어서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데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 중 하나이고, 타락한 인간의 죄가 어느 정도 통제되도록 사람의 마음에 남겨 주신 일반은총의 역할을 합니다. 죄인은 이 양심 때문에 불편하지만 양심을 없앨 수 없습니다. 단지 계속 죄를 짓기 위해, 죄책감을 숨기기 위해 양심을 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죄인이 심판 때에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하게 만들 증인이 될 것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양심은 지옥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어서 영적 고통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양심이 그렇게 죄인 안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우리의 상태와 행위에 문제가 있다고 죄책감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지만 지정의처럼 양심도 부패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죄로 인해 매우 약해져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양심적이어야 하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이 매우 양심적이라고 해서 구원받은 증거는 아닙니다. ‘양심선언’, ‘양심적 거부’처럼 우리는 양심적이라고 말하면 순수하고, 자발적인 선행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의 양심은 우리가 잘 아는 디모데전서 4장 2절의 내용인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로 오염되어 약해졌지만 그나마 죄를 덜 짓도록 소리 지르는 양심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고 양심의 부르짖음을 잠재우기 위해 타락한 지정의를 사용합니다. 불편한 양심을 잠잠하게 재우는, 거짓 평안을 만드는 일에 양심이 협조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도덕주의, 율법주의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는 죄인은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불편한 양심을 달래려고 몇 가지 도덕을 지키는 것이나 선행을 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한쪽에서는 죄를 짓고 한쪽에서는 그 죄책감을 덮고자 뭔가 윤리적인 일을 해서 양심을 속입니다. 사람들이 탐식과 폭식을 즐기면서 한편으로는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것, 또 게임과 유흥을 즐기다 죄책감이 생기면 책이나 성경을 읽는 것이 흔한 예입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속임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설픈 도덕주의, 율법주의가 그런 일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양심을 속이는 일은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하고 자기 죄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 때문에 질서나 법규를 어기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불안해하고, 자신의 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예민해서 우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양심의 활동은 목적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흠 없음, 자기만족을 위한 민감함에 불과합니다. 죄로 인해 양심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능력을 잃었기에 그저 양심은 불편함만 줄 뿐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방향과 목적을 잃은 양심이 주는 예민함 때문에 그 사람은 양심의 비난을 만족시킬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지적하는 것으로 양심의 괴로움을 해소하려 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 어설픈 도덕주의자, 양심적 불만에 예민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양심을 속이려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소리 지르는 양심을 만족시키려 하지만 자기 죄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르니 자기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사람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보다 상대나 다른 것에서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시자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느꼈지만 하나님께 회개하고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과 하나님께 불만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헤롯 왕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자 그를 죽인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와 헛된 꼼꼼함과 예민함을 건드린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양심이 있어서 자기가 잘못한 줄은 알고,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방향으로 더 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오염된 양심을 신뢰해서는 안 되고, 자신이 교묘하게 양심을 잠재우고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양심이 회복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는 히브리서 4장 말씀대로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찌름을 당하고 쪼개져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양심, 속이는 양심, ‘다른 사람들도 그런데 뭐’라고 생각하며 거짓 안심과 거짓 평화를 얻는 양심이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양심, 사람의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양심이 되려면 죽은 것을 살리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 양심이 예민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죄로 불안한, 쉬지 못하는 우리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 때문에 불안하고, 뭔가를 행해서 만족을 얻으려는 공허한 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만 위로와 안식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거듭난 자의 양심,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양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양심만이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세상의 어떤 두려움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가 아무리 고행과 선행을 실천해도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과 양심의 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사라졌고, 자유와 해방과 구원의 확신을 경험했습니다. 양심의 고통의 문제는 죄이기 때문에 세상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양심의 평화를 누리게 해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또 우리의 양심이 가장 떳떳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편에 용기 있게 서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전도자들과 성도들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며 복음을 전한 것처럼, 양심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충성하는 자에게만 있습니다. 세상 어떤 위협에도 물러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이 참 양심의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양심의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