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9-51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임신 중에 서로 교제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분명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잘 알고 지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것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세례요한이 어떻게 얻게 되었습니까? 32절에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오는 것을 그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려오신 것이 왜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증거가 되는 지는 33절에 나와 있는데,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그 사건으로 증거를 보이실 것이라고 세례요한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이고 “하나님의 아들(34절)”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그런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31절과 33절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가 2번 반복됩니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예수님을 알았지만 그분이 진정 누구이신지를 아는 지식은 인간의 관찰과 경험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에 의해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 날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둘을 예수님께 소개했습니다. 그 둘 중 하나인 안드레가 예수님을 메시야인줄 알게 되고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게바” 즉 반석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대해 알고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다음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던 중에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어떻게 해서 빌립이 예수님의 그 한마디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따라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물론 본문에 나와 있지 않은 예수님과 빌립의 다른 대화나 이전의 관계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자인 요한은 빌립 보다는 빌립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된 나다나엘에게 중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알게 되자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바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빌립은 덧붙여서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나다나엘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인물이 나오겠냐.’고 냉소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의 이름에 붙어 다녔던 ‘나사렛’, 바로 예수님이 성장하셨던 나사렛은 시골 촌구석이었기 때문입니다. 뭔가 유능한 일 하거나, 사람들을 이끌고 큰일을 하려면 성읍도시인 예루살렘으로 가서 등장해야 하는데 시골인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한 인물이 제대로 성장하고 크게 되려면 서울에서 배우고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안 봐도 알겠다는 듯이 판단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기대를 버리는 대답을 했지만, 그래도 빌립은 ‘와 보라’라고 나다나엘에게 권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는지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자신의 평가에 나다나엘은 놀랐는지, 예수님께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아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빌립이 널 부르러 가기 전부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봤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놀라서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한 것은 단지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예수께서 근처에 계시지도 않으셨으면서 자기가 거기 있는 것을 알아맞히신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진짜 놀란 것은 바로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간사하고 속이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라고 다시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야곱에 대해서 묵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추측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실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그렇게 놀라서 자기를 믿는 것을 보시고, ‘네가 더 큰 일을 경험할 것인데, 바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은 야곱이 벧엘에서 꿈꾼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을 뒤집어서 그의 머릿속 생각을 드러내시는 신적인 능력을 통해 자신을 믿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해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폄하했는데 예수님은 그를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자라고 인정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한 것 까지 다 알고 계셨을 것에 순간 부끄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고백한 내용들은 이렇습니다. 세례요한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 안드레의 “메시야”, 빌립의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나다나엘의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이 고백들은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이 배워서, 논리적 판단의 결론으로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앞의 10절에서 말하는 대로 빛이신 그를 알지 못하는 어둔 세상이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이 고백들이 어떻게 입에서 나왔느냐면 자기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을 사람이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들키지 않으면서 상대에 대해 먼저 많이 알려고 합니다. 나에게 세상이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기죽게 만드는 것이 있고 상대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감정과 표정을 잘 관리할 줄 알면 상대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판단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깨어집니까? 예수님을 통해 깨집니다. 내가 어떠한들 그분이 나를 다 알고 계심을 깨닫게 될 때에 숨거나 속일 수 없음을 알게 되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그분을 높이게 되고, 그 분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신을 알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자신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시고, 자신은 말씀이신 그분의 외치는 소리일 뿐이고, 그분의 신발끈도 풀지 못할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제자들도 그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런 행동은 자기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가 아니냐고 칭송하고 기대하지만 나를 다 알고 계신 그분, 진짜 메시야이신 그분을 속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도, 나다나엘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나 자신을 이미 알고 계신 그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눅5:8에서 베드로가 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을 믿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분이 나를 이미 알고 계시며, 그분을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다 알고 계시며, 내가 품은 생각과 감정을 다 알고 계시며, 내가 행한 일을 다 알고 계신 그분이 나를 싫어하지 않으시고 오셨다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지금도 인내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그분 앞에 정직하게 만듭니다. 그분이 하신 일이 옳은 일임을 인정하게 합니다. 그분께 순종하게 합니다. 그분을 높이게 합니다. 나를 아시는 주님, 그러나 겸손히 조용히 나를 존중하시는 그분이기에 우리는 그분 앞에 한 없이 겸손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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