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과 제자들뿐 아니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함께 갔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하루에 끝나지 않고 일주일 간 계속되었기 때문에 많은 음식이 소비되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포도주가 음료 역할을 했던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잔치에서 포도주는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고 예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11절에 보면 특별히 이 표적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특별히 정식 제자들과 시작한 공생애 사역의 첫 표적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된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께 그것을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바닥난 사실을 그냥 말한 것이 아니라, 분명 예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기대를 느끼셨기 때문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부탁을 공손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안 하겠다는데, 마리아가 자기 맘대로 예수님을 몰아가는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거절하셨지만 결국 마리아의 부탁대로 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의 기적은 예수님이 어머니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셔서 어쩔 수 없이 하신 것, 사람의 필요나 요청에 근거한 것, 사람들의 혼인잔치를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님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고는 부탁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과 사람의 바람, 요구가 일치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의도를 가지고 그 일을 행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결례에 사용하는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결례에 사용하는 돌항아리 입니까? 결례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씻는 물을 담는 항아리 입니다. 손을 씻고 발을 씻는 행위에 의해 자기들이 깨끗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전통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돌항아리에 예수님께서 물을 담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왜 돌항아리에 담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까? 바로 외형적인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정결, 속사람의 변화를 예수님께서 암시하신 것입니다. 돌항아리에 담긴 물로 몸의 겉을 닦는 것이 아니라, 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포도주가 몸속으로 들어가면서 속을 다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가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참된 변화, 속사람의 변화를 위해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5:38을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형식적인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참으로 변해야 할 속마음은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문제없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기준대로 따르지 않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위선적인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포도주와 부대를 비유로 사용하시면서 근본적인 변화, 담는 그릇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정결례에 사용되며 지난날 물을 담았던 돌항아리는 이제 포도주를 담는 항아리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겉과 속을 바꾸는 일을 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바꾸는 종교인에게는 구원은 없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바꾸신 것을 경험하는 자가 구원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항아리에 물은 채워졌고, 그것을 잔치를 주관하는 연회장에게 떠다주라는 말씀에 그대로 했습니다. 연회장은 그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부릅니다. 그는 꽤나 포도주에 대해 아는 자였던지,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왜 이제 내 놓은거냐고 묻습니다. 잔치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놓아서 사람들에게 ‘이 주인이 잔치를 제대로 준비했구만!’하는 칭찬을 좀 들은 다음에 사람들이 취하면 맛을 모르니까 나중에 가서 별로 좋지 않은 포도주를 내놓는 것이 상식인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주인 앞에서 약간의 놀라움이 섞인 잘난 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르게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좀 전에 어머니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스타가 되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도 아직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사람들에게 모르게, 드러나지 않게 포도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제자들과 말씀에 순종했던 종들만 알았습니다. 연회장은 뒤에서 벌어진 이 일을 모르면서, 은혜의 근원을 모르면서 아는 체를 한 사람입니다. 자기 지식으로, 상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일어난 일을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좋은 포도주를 숨겨놨다가 이제야 내놓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역시 사람들이 자기 잘난 체를 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우리가 그 비밀을 도저히 다 알아채지 못하게, 비밀스럽게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마치 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처럼 떠들어 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신데, 자기가 만들어낸 냥, 자기가 발견해 낸 것처럼,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가격을 매기고, 사고팔고 하면서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공비법이 있는 것처럼 남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진정한 성도는 무엇을 경험하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있게 하신, 모든 사건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연회장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앞에 나가서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말하는 우스운 행동을 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의 말에도 중요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가 아주 좋은 포도주라는 사실입니다. 잔치에 사용하는 포도주는 품질이 최상품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중상위급의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잔치를 위해 연회장까지 둘 정도면 그 잔치 포도주의 품질은 어느 정도 보장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잔치에 제공된 포도주보다 예수님이 만들어주신 포도주가 더 뛰어나다는 것은 정말 최상의 포도주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포도주 중 가장 맛있는 포도주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최상의 포도주를 주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를 통해 사람들에게 특별히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이 이러한 최상의 포도주와 같은 것임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역사 속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는 가장 탁월한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엄청난 일처럼 죄인을 자녀로 바꾸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술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연법칙상 포도주가 될 수 없는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없던 것들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죄인이 목욕을 수천 번 한다고,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죄짓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해보십시오. 마음 속 악한 욕망과 죄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사라지는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가망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 비참함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보다 문제가 많은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난 괜찮아 쟤보다 낫잖아.”하고 자기위안을 삼습니다. 또 착한 척,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기적인 자기 탐욕과 악한 것들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자신,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진 자신에 대해 문제시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가망이 없습니다. 스스로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세상 살 수록 사람들에 대해 조심합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이혼합니까? 나 자신이나 상대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력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첨가해서 그럴 듯하게 속일 수는 있지만 물만 가지고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그 분이 결코 변할 수 없는 죄인을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는 거듭남 (요 2:23-3:12) (0) | 2015.02.15 |
---|---|
인간을 위한 종교가 모독당하다 (요 2:13-22) (0) | 2015.02.08 |
나를 이미 아시는 주님을 만나다.(요 1:19-51) (0) | 2015.01.25 |
어둠을 깨닫게 하는 빛 (요 1:4-13) (0) | 2015.01.18 |
완전한 말씀이신 그리스도 (요 1:1-3) (0) | 2015.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