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1절부터 3절이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살폈습니다. 그가 말씀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말씀”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의지의 실행으로 드러난 것처럼, “빛”이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혼돈의 상태에서 생명을 위한 질서와 생명 자체를 주신 근원임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창조의 권위와 능력이고 빛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 말씀과 빛이 세상이 창조를 하셨던 것처럼 그것은 재창조를 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보증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의해 창조의 처음에 빛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 생명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서 그 빛은 우주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빛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시작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생겨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창조의 시행자로서 등장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작, 빛이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명, 모든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잠시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빛은 생명을 지속시켜 줍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빛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그 빛이 나를 위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따사로운 빛을 즐깁니다. 식물들도 빛을 향해 자라고, 빛이 있어야 생존을 위한 물질을 합성할 수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생명은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을 있게 한, 자신들을 위한 빛임을 생명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빛을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빛이 생명과 연관된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태양빛을 쬐는 것이 몸 뿐 아니라 정서, 심리까지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압니다. 그런 인간은 때로 그 빛을 신성시하기까지 합니다. 하늘에서 빛을 내는 태양과 달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12월 31일 밤은 새해의 첫 해를 맞이하며 기도를 하려고 동해로 가는 도로가 극심한 정체가 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빛의 근원들을 바라고 숭배하기까지 하면서도 우주적, 물리적인 빛의 근원이시고 또 생명의 빛, 영혼의 빛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자연스런 경외와 갈망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있게 한 그 빛을 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외면하고 회피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4절은 그런 사람의 상태를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눈을 피해 자신을 가리고 숨긴 것처럼 타락한 사람은 빛이신 주님을 피합니다. 그 빛이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인데, 그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자기에게 진정 유익한 것을 버리고 해로운 것을 가까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하게 되는 가려짐이 상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어둠으로 표현됩니다. 자신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있는데 지각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거부하는 인간의 무지가 계속되는 것을 막으시려고 여러 일을 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선지자들을 보내신 일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백성들이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와서 구원해야 하는 것을 계속 알리셨습니다. 그 선지자들 중 한 명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 요한”은 그 세례요한을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어두운 상태를 깨닫고 참 빛을 바라는 상태가 되도록, 그 빛이 비추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선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알고 추종하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세례요한을 둘러싼 그런 분위기를 묘사하는 부분이 있고, 오늘 본문 19절부터 보면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의 정체에 대해 묻자 세례요한 자신도 그런 것을 느꼈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신발끈을 푸는 일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마11:11) 하실 만큼 세례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토록 비범한 세례요한이었지만 그는 그 빛이 아니고, 그저 참 빛을 증거하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직접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라 달처럼 빛을 반사해서 진짜 빛을 보게 하는 반사체였던 것입니다. 그가 가리킨 참 빛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참 생명의 빛이 어둠 가운데 들어오셨는데, 그 빛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자들이 안타깝게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피조물이 자기를 지은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11절)하였습니다. 지으셨을 뿐 아니라 특별히 자기백성 삼으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건물을 설계한 설계자가 와서 ‘니네들 지금 잘못 짓고 있으니까 여기 여기 부수고 다시 지어라’라고 하는데 고용된 일군들이 ‘아니 우리가 지금까지 노력해서 열심히 이만큼 했는데 왜 고칩니까?’하면서 대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나타내고, 보여주신 것들이 그동안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진짜라고 알고 지낸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시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오랫동안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원자로 믿고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빛을 기다렸습니다. 암흑과 같은 시대를 평정하시고 세상을 밝게 만드실 분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만 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이 세상이 천국으로 바뀌고, 슬픔과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만 오시면 그분을 따르리라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니까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실망했습니다. 온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어둠을 물리치고 밝은 기쁨과 빛을 주실 예수님이 이상하게도 자신들에게 빛을 비추시면서 자신들의 죄를 들춰내시고, 자신들의 안정과 권력과 자존심을 위태롭게 하시니까 실망한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다가 점점 자기들의 기대와는 다른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를 십자가로 내 몰았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겠다고 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종교에서도 그것이 나타납니다. 문제 해결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동양종교, 뉴에이지 종교는 자기 안에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문제를 스스로 깨닫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초월하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 혼자서 수행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 보호 본능이 극대화된 모습이고, 그것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자기 신성화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듣기 싫지만 우리의 실상을 알려주는 음성이 외부에서 들려졌을 때 우리 실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도 진짜 심각한 것은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자각 할 때면 이미 늦습니다. 내 능력 밖의,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기회를 줍니다. 외부의 진단, 나도 몰랐던 나의 실체를 드러내는 말은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것은 항상 당황스럽습니다. 충격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 길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 빛이 세상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비추십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어둠이 빛을 피할 수 있습니까? 빛은 어둠을 사라지게 합니다.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깁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신 분, 우리를 완전히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우리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자신의 죄인 된 것을 깨닫는 씨름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두운 것을 알게 될 때에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구원은 거저 은혜로 받지만 거룩이 무엇인지는 뼈저리게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죄에서 건져내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원래의 자기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잔치에 본래 초청을 받은 자들이 거절했으니 길가에서 누구든지 오라고 초청을 하시면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초청을 받은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지적되는 것이 있습니다. 합당치 않다. 죄인이다. 예복을 안 입었다. 자기의 실체를 알아야 가릴 것이 아닙니까! 자기가 죄인인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어둠을 알아야 참 빛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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