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실로암의 목적 (요 9:1-34)

따뜻한 진리 2015. 5. 31. 23:46

요한복음 9:1-3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만약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가 어느 날 보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단지 소리와 촉감과 냄새를 통해 모든 것을 부분적으로 인식하다가 눈으로 전체를 한 번에 느낄 수 있게 된다면, 다양한 색들을 갑자기 느끼게 된다면 자신의 그런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선천적인 시각장애를 가졌던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만나서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주셨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눈이 치료되어 보게 되었고,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눈을 뜬 후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그 눈 뜬 사람을 치료하면서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닌 분명한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믿음의 고백을 했고,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고백을 부정했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하게 살펴볼 첫 번째는 눈 뜬 자와 바리새인들의 관계입니다. 17절에서 그 눈 뜬 자는 바리새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했고, 30~33절에서 자신의 눈 뜬 것을 보면 당연히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온 분임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했습니다. 27, 28절을 보면 눈 뜬 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도 그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예수님 편에 선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죄인이니 예수를 높이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와 하나님은 관계가 없고 네가 눈 뜬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예수가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는 식으로 거짓되게 그의 경험을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29절에서 그들은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34절에서 그들은 그 눈 뜬 자가 자신들 뜻대로 안 되자 그에게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주제에 우리를 가르치려하냐고 욕하며 쫓아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눈 뜬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계속 의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 되고, 고백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이 눈 뜬 사람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소문이 자꾸 커지면 예수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죽이려는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당사자인 이 눈 뜬 자가 예수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 있으니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거짓된 이해를 주입시켜서 회유하려 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무서운 권력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이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의 부모들이 바리새인들의 종교권력을 두려워해서 자기 아들을 변호하지 못했던 것을 봅니다. 34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눈뜬 자를 쫓아냈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볼 때 그가 눈 뜬 이후의 삶은 이전보다 더 위험해졌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드러납니까? 바리새인들의 거짓과 강압이 더할수록 눈 뜬 자는 점점 예수님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문하기 위한 그들의 질문이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믿음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두 번째로 살필 것은 예수님과 눈 뜬 자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인 그 사람을 고치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는데 왜 그 자리에서 고치시지 않고 실로암에 보내셨을까요? 7절을 보면 실로암의 의미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누가 누구를 보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눈 먼 자를 눈 뜨게 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보냄이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눈 먼 자였던 그 사람이 눈을 뜬 후에 바리새인들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그는 마치 보냄을 받은’, ‘제자처럼 말합니다. 그러니 실로암”, “보냄을 받았다눈 먼 자가 육체의 눈을 떠서 보게 하려는 보냄이었고, 이어서 영적으로 어두운 바리새인들에게 증거하게 하려는 보냄이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눈 뜨게 될 것을 알지 못한 채 보냄을 받은 곳에 가서 씻어서 눈을 떴고, 눈을 뜬 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 바리새인들에게 갔습니다(13). 그는 처음부터 주님이 자신을 보내셨다는 사명을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보냄 받은 자 다운 일들을 경험했고, 믿음을 갖게 되었고, 증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보냄을 받은자가 눈 뜬 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보냄을 받았다는 눈 뜬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과도 연관됩니다. 앞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주장으로 종교지도자들과 대립했습니다. 눈 뜬 자가 바리새인들에게 당한 일들을 보면 예수님이 당하신 일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취급당하시는지를 그 사람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는 주님이 진정 보냄을 받은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33).

 

    예수님이 눈먼 자였던 그를 실로암으로 보내신 이유는 그렇게 예수님 자신이 누구에게서 오셨는지, 누가 보내셨는지를 다시 한 번 역설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를 보내심으로, 누구든지 보냄 받은 자는 보낸 자의 능력과 인격을 마땅히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눈 뜬 자가 자신을 보낸 예수님의 능력과 인격을 드러내 듯, 예수님은 인격과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눈 뜬 자는 자신을 보내신 예수님 때문에 함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눈 뜬 것 때문에 그는 놀라운 기쁨도 얻었지만 고난도 얻었습니다. 빛을 보게 된, 눈을 뜨게 된 그는 세상을 보게 되는 기쁨과 다시 태어난 것에 견줄만한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얻었지만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것 때문에 고통과 핍박을 당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내심, 명령에 순종할 때 저항하는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더욱 알게 되고,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아브라함이 그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갔습니다. 그들은 그 길에서 주님을 거절하는 세상, 반역하는 세상,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신을 삼켜버리려는 세상을 경험하며 주님이 하신 말씀이 옳음을 알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고대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겪으신 일을 자신도 겪으며 주님에 대한 애착과 확신이 깊어졌습니다. 주님의 부르심, 보내심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위험을 줍니다. 우리가 주님 편에 섰기 때문에 닥쳐오는 고난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주님으로 인한 길을 갈 때에 생기는 고난으로 우리가 주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일이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