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9:1-2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에 이어 아이성까지 점령하자 다급해진 가나안의 남부지역 성읍들은 연합을 이루어 이스라엘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기브온 족속은 다른 일을 꾸몄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어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24절에 나오는 대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과정에서 그곳 가나안에 거주하는 자들은 멸망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멸망의 대상에서 자신들이 제외되길 바라며 지혜를 짜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나안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그저 이스라엘의 위대함을 듣고 멀리서 조약을 맺으러 온 나라인 것처럼 꾸밉니다. 그래서 기브온 사신들은 멀리서 온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해진 옷과 신발, 찢어진 포도주 가죽부대와 곰팡이 핀 떡으로 위장으로 하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갔던 것입니다.
7절을 보면 기브온 사신들이 조약을 맺자고 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는 듯하니”라고 말하면서 그 사신들이 자신들 근처에서 온 것으로 처음에는 의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신들이 자신들을 “종”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들의 행색을 보면 떠나 온지 오래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믿어달라고, 조약을 맺자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기브온 사신들과 평화협정을 맺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묻지 않고 그런 일을 했다고 지적합니다.
삼 일이 지났을 때 이스라엘은 조약을 맺은 그들이 가까이 있는 가나안 땅의 족속들임을 알게 되었고, 이스라엘 회중은 그런 조약을 맺은 당사자인 이스라엘 족장들을 원망했습니다. 그 조약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고 한 것이기 때문에 기브온을 멸망시킬 수도 없고, 그 성읍들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또 가나안인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되니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이 속였기 때문에 저주의 의미로 그들이 종이 되게 했습니다. 기브온 족속은 하나님의 제단을 위한 나무를 패고, 물 긷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기브온 주변에 있는 가나안의 성읍들은 힘을 합쳐서 전쟁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 멸망했던 여리고나 아이의 전투력보다 커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기브온은 살기 위한 마지막 기회를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 고민했을 것입니다. 기브온이 다른 가나안 부족과의 그런 연합을 택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기로 결정한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턱대고 이스라엘에 투항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에 충실하려고 기브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전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면 정체가 탄로 난 후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사”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이 있지만 그들은 주변 성읍과 연합을 해서 이스라엘과 최후의 전쟁을 하는 것보다 이스라엘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 판단을 하게 된 근거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9절과 10절과 24절에서 기브온 사람들이 말한 내용을 보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사는 자신들을 멸하시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계신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가 이끄시는 이스라엘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으면 그 약속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유효할 것임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6절과 11절에서 그들은 조약을 맺자고 자꾸 말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종합할 때 어차피 힘으로 상대해서는 생존 가능성이 없고, 진멸될 가나안 족속이라는 대상에서 자신들이 예외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임을 결론 내린 것입니다. 그 방법이 통하려면 이스라엘이 속아줘야 하고, 또 조약을 통해 이스라엘에 속할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길 바라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혹시라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받아주실지 모른다는 기대가 없었다면 기브온 사람들은 위험을 안고 그런 시도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브온은 진정 중요한 것을 알고 구했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힘이 있으면 여호와의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더라도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길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목숨은 부지하겠다며 이웃족속과의 연합을 배신한 비겁함이 아닙니다. 또 종이 되어서라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라는 비굴한 가치관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기브온이 다른 족속과 연합해서 이스라엘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는 것이 의리와 명예를 지키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서는 세상의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지켜도 어리석고 허망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6을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84:10을 보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기자가 말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인간이 추구한 다른 의미들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섰을 때 의리도 가치가 있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비장하게 싸우다 죽는 것도 명예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기브온 때문에 이스라엘이 곤란한 상황이 되자 이스라엘 회중은 불평했습니다. 26절에 나오는대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죽이지 못하게 했고 대신 기브온 사람들이 나무를 패고 물 긷는 자들이 되게 했는데, 그중에서도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그 일을 하게 했습니다. 23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기브온이 속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고 말했지만 그들이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종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팬 나무는 제물을 태우는데 사용했고, 길어온 물은 제사에 필요한 정결례와 제물을 씻는 것에 사용되었을 것인데 그들이 그런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과 자신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보고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브온이 속인 것은 잘못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조약을 맺은 것도 잘못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브온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본문 다음인 10장을 보면 기브온이 연합군에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보복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도우셨는데, 이것을 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브온에게 은혜를 허락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기브온은 사무엘서에 몇 번 등장하고,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장소가 기브온이었고(왕상3),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기브온 사람들이 포함되었습니다(느3:7). 그렇게 기브온은 멸망당할 자들이었지만 인간의 실수와 죄가 기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기브온에도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리고에서 라합의 가족이 이스라엘의 일부로 편입된 것처럼, 가나안 연합세력 가운데서 기브온이라는 한 족속이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멸망되어야 할 가나안 족속 기브온이 이스라엘에 속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었고 죄인들인데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속아서 기브온을 받아들였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를 완전히 아시면서 받아주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자신들이 저주를 당할까 두려워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받아주시면서 기꺼이 우리 대신 저주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이십니다.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 백성 되도록 예수님이 통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브온이 살기 위해 이스라엘 속한 것처럼 우리가 살 길은 주님께 속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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