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6: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서로를 돌보는 이상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불협화음이 나타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란 유대 땅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먼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으니 그 지역에 살던 히브리파 사람들은 결속력이나 관계망이 흩어져 살다가 모인 헬라파 유대인들보다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히브리파 사람들이 일부러 헬라파 과부들을 소외시키려 하지 않았어도 인간관계의 한계상 헬라파 과부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헬라파 사람들의 원망이 표출되자 사도들은 초대교회 모든 구성원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마련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는 구제와 섬김 같은 제반 활동들을 맡을 집사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도들끼리 집사 일곱을 택하도록 위임시켰고, 자신들은 오직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집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성도들이 세운 일곱 집사에게 안수를 했고, 그 일로 하나님의 말씀이 더 왕성해져서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첫 번째는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이 계속 지속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에 사로잡혔을 때 성도들의 인간적인 문제가 완전히 사라져 천사들처럼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는 불공평이 발생했고, 그 불공평을 겪은 당사자들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참고 넘길 수 없었고, 관련된 자들은 원망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이었습니다. 사도들 역시 당황하지 않고 그 문제 해결에 집중할 사역자들을 세우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공동체이지만 그러나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는 오직 믿음이 가장 중요하지만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이루어 가기 위해 믿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성령의 은혜와 더불어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 성숙한 인격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일곱 집사를 택할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택하라고 사도들이 말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가 주력해야 할 우선순위가 무엇인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이 교회의 주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는 역사상 세상 어떤 단체나 기관보다 그 선행을 먼저 시작해 왔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이느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굶어 죽어가는 자에게 음식을, 피 흘리는 자에게 치료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행이 일으키는 뿌듯한 자아만족과 상승감은 매우 강력해서 행위가 나의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 같은 착각을 쉽게 일으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불성실하고 형식적인데도 전혀 문제를 못 느낄 만큼 선행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활동을 많이 하는 교회에 자신이 속한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인간의 행위가 복음을 가리는 것입니다.
선행은 교회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 거듭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라면 선행은 아무리 베풀어도 만족과 자랑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선행이 이웃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도와 교회는 그런 돌봄, 선행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결핍과 가난,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는 사람의 선행이 아닌 오직 복음으로만 해결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다른 봉사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우선순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집사들을 세워서 맡긴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달되어 그 진리로 각 성도가 생명을 경험하고, 헛된 거짓과 속박에 얽매여 사는 영혼이 자유하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견고한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선행이 복음의 우선순위를 가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단지 죽어가는 영혼에게 복음 들을 기회를 연장시켜주는 역할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가운데 선행과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도는 자신의 선행 실천을 통해 성취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시 복음을 확신하고 인간을 근본적으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본문 속 초대교회와 지상의 모든 교회가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이지만 죄로 인한 문제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데,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 얻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구원 받았지만 사라지지 않는 결핍과 결점을 일으키는 죄를 발견할 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임을 계속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 인간의 행위와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임을 잊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힐 때 성도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나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의지하는 것만이 그가 지으신 피조물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고 한 것은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을 버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저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순종할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과 더불어 기도는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실제로 의존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성도들이 그런 우선순위에 따라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7절을 보면 제자의 수가 많아졌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이 도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제사장들은 유대교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 제사장들이 복음을 믿었다는 것은 유대교가 틀렸다는 것, 모든 율법과 성전 제사의 완성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생존 기반, 권력과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초대교회는 우선순위를 잘 지켜갔습니다. 복음은 그저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 사랑하고, 행복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진정한 복을 누리게 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회심자를 낳는 것이 교회의 우선 사역인줄 알고 그것을 위해 말씀과 기도에 집중했고, 그 결과 순종하는 자들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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