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두려움이 있는 사랑 (신 7장)

따뜻한 진리 2017. 3. 26. 23:38

신명기 7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이 진멸에 관한 명령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이 과연 사랑의 신이고,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맞는가 하고 의심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의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종교가 그렇듯이 가나안의 종교는 그들의 모든 정신과 문화를 비롯한 삶의 양식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계명의 1~4계명을 정면으로 위배할 뿐 아니라 나머지 계명을 순종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16절이 말하는대로 이스라엘은 전쟁시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우위에 두고 가나안 사람들을 살려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장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고, 그리 사악하게 보이지 않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이 진멸을 명령하신 것을 부당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은 자기중심적일 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을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죽이라고 명령하시지 않아도 상대를 잔인하게 대하고 함부로 죽입니다. 범죄 현장이나 전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독일이나 일본이 침략국에서 자행한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반대로 권력자들은 특정 범죄자가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르도록 사형을 집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신세 진 것을 갚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사면하는 일도 있습니다. 인간은 무고한 자를 제멋대로 죽이고, 마땅히 죽어야 할 자를 제멋대로 살립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개인의 사형, 집단에 대한 진멸 명령을 하신 것에 대해 인간은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백성들에 대한 진멸을 명령하신 것은 마땅한 심판이며 오히려 우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런 진멸 명령 중에서도 가나안 백성들 중 일부를 구원하셨습니다. 기생 라합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로 전향하는 개인이나 집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진멸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가나안 사람들과 언약도 맺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혼인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16절에서도 가나안 족속들 긍휼히 보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족속을 진멸시키면 되는데 왜 가나안 사람들이 살아있어서 그들과 교류하게 될 것을 말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들의 판단을 더 중요시 여기고, 가나안 백성들을 이용하려고 살려두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으로 우쭐해져 불순종 할 여유를 부리고,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어도 그들에게 영향 받지 않으면서 이용할 수 있는 통제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힘이 세고, 강한 민족이었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나안을 통제할 능력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여유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한 능력이 안 되는 민족이었습니다. 자격이 안 되는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너희를 사랑하셔서 무조건 택하신 것이지 너희가 어떤 탁월함이 있어서 뽑힌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가나안을 이길 힘이 없었고 영적으로도 가나안을 이길 힘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얻을 때만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동안 복을 누리려면 계속 하나님을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자신들이 가나안 족속들보다 우월한 것처럼 착각 하고, 여유 부리고, 가나안 족속들을 배려할 만큼 대단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어리석고 연약한 자들인 줄 안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17절부터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두려워 말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가나안 족속의 수와 우월함 때문에 이스라엘이 두려움에 빠져 싸우라는 명령에 주저하고 순종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능력을 기억하라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진멸시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불쌍히 여기고 공존 가능한 이웃으로 여기는 것과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함께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어떤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가도 한 순간 무서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하기 위해 모순된 태도를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싸우라고 말씀하실 때는 두려워하고, 이기게 해주시면 불쌍히 여기는 변덕이 인간 안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 인식, 자기 판단, 자기 감정, 자기 의로움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사랑했고, 자신들의 죄성을 충족시켜줄 가나안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을 경고합니까? 4, 25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우상을 사랑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두려움과 사랑을 경험해야 하는데, 우상을 두고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주저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긍휼이 여기고 교류했던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정신을 닮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들에 대해 단호해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연민과 관용을 품으면서 동질화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불쌍히 여기거나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세상을 즐길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1서의 말씀대로 인간들이 세워 놓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죄인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영향을 받으면 함께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