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14-4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위험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두려운 현상들 때문에 거짓에 미혹될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방종할 위험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종말을 살아가는 자들 중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서 일어날 착각과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세 명의 종들에게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주었는데, 돌아와서 보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해서 다섯을 더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주인은 그 종들을 칭찬했고, 자신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땅 속에 감춰두었다가 주인이 오자 꺼내서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종은 주인 당신이 다른 사람이 씨를 심고 수고한 땅에서 거둬들이는 지독한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그랬다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에게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 돈을 필요한 자에게 빌려줘서 이자라도 받았으면 나에게 이익에 되지 않았겠냐? 너는 악하고 게으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어두운 곳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종이 주인을 악하게 본 이유는 다른 종들보다 자기에게 적게 맡긴 것을 두고 무시당한 것이라 여겼든지 아니면 주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보다 자기가 잘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이 기회조차 주지 않는 불공평한 존재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주인을 미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 남긴 종이나 모두 착하고 충성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종은 자신의 게으름과 자기중심적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인의 권한을 악하게 보고 핑계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인자이신 주님은 마지막 때에 양은 오른편에 두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염소는 왼편에 두어 영원한 벌에 처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양들은 예수님이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리실 때 돌보던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지옥에 갈 염소들은 예수님이 그런 고난을 당하실 때에 돌보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사회적 구원을 강조하는 진보진영에서 중요시하는 본문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개인의 믿음과 구원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억눌리고 망가진 세상 전체를 구원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목표이고, 기독교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보편적으로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리, 정의, 평화, 구제가 그들의 슬로건입니다. 카톨릭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숨어 계신다고 말합니다. 또 불교에서는 중생을 돌보는 것이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본문 말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은혜로 구원 얻는 복음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행위에 집중합니다. 그것을 장려하기 위해 부처 또는 예수가 고통당하는 자들로 모습을 감추고 왔다고 말하면 나의 착한 행위가 신비로운 만족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자신에게 한 것임을 알고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양들로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을 섬겼습니까?’라고 물으면서 의아해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섬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비천한 자들을 돌본 것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반대로 염소로 분류되는 자들, 지옥에 갈 자들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진보 기독교나 카톨릭처럼 고통당하는 자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했습니다. 자신들이 언제든 예수님을 섬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는 세상의 모든 소외된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처럼 고통당하는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제자들로 한정되어 사용되고 있고(12:48-50, 28:10), ‘지극히 작은 자’ 역시 (10:42, 18:6, 18:10, 18:14) 제자 공동체 안에서 약한 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양과 염소 비유는 전 인류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복음 없는 종교들이 강조하는 인류애, 자비, 평화, 긍휼이 구원과는 무관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보편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랑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행위에 근거를 두고 구원을 기대하는 자들, 즉 염소로 비유된 자들 같은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본문에서 구원받는 양들에 해당하는 자들은 죄인인 자신들이 은혜로 거저 구원 얻는 것을 알고, 자신들의 행위가 무익함을 철저히 아는 가운데,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지체들을 당연히 돕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복음과 함께 고난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가 주님을 섬긴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나 이단들은 자신들을 포장하기 위해 사랑과 나눔을 외칠 것이고 그것으로 안심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비유는 구원받는 성도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주님의 주권을 판단하거나 오용하면서 자신들의 게으름과 불순종을 핑계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선택교리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결정하시는 하나님께 불만을 품거나, 나의 구원이 하나님께 달렸으니 게으름과 방종에 빠지는 것을 합리화하는 그런 것입니다. 또 양과 염소 비유는 앞의 것과 반대로 적극적으로 선한 행위를 촉구할 때 생기는 자기공로화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 구원받는 자는 사랑의 대상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이고, 다음으로 같은 길을 가면서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지체들이며 그 다음으로 세상인데, 거짓복음을 따르는 교회나 다른 종교는 자신들의 사랑을 자랑하기 위해 모든 세상을 포괄하는 사랑을 자신들이 실천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종말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마지막에 이런 비유를 드셨겠습니까? 종말을 살아가는 신자들은 거짓에 미혹되지 않고, 일상적인 순종과 헌신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도 이런 잘못된 동기와 착각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끝나고 무용지물이 되니 뭐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하면서 게으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분량이 다르지만 주님께서 능력 주시고, 소명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서 충성해야 합니다. 남들이 잘 하니까 나는 안 해도 되겠네 하는 생각이나, 나는 별로 대단한 능력이 없으니까 가만있어도 되겠네 하는 생각을 버리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내게 한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인류애적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 지옥에 처할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품을 때 참된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더욱 깨닫게 되고, 또한 그런 사랑을 위해 함께 인내하고 고난당하는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히브리서에 말한대로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사랑으로 더욱 권면하고’, 갈라디아서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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