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왜 칭의 교리인가.

따뜻한 진리 2013. 12. 30. 23:46

                                                                                                   

 왜 칭의 교리인가.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제목에서의 ‘칭의교리’에서 칭의를 말하기 이전에 왜 교리인가를 먼저 말하겠습니다. 저는 교리가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경험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대교회에는 교리를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현실감과 경험에서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라는 말을 듣거나 배울 때 그것이야말로 경험적 산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리는 인간이 경험하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과 현상들 속에서 고민하고 논쟁하고, 피흘려 투쟁한 결과물입니다. 결코 머리 좋은 사람이나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세상의 국가와 제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자유, 평등, 박애, 민주주의 같은 사상과 그것이 녹아든 제도가 없었던 과거에는 독재와 불평등, 억압이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고민이 있었고, 논리, 철학, 사상으로 발전되어 그것이 권력과의 투쟁 속에서 제도에 녹아들어 오늘날의 국가들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과목 시간에 배운 것이 그것 아닙니까? 세상의 역사와 나라와 제도는 그렇게 발전해 왔습니다. 학자나 위정자들만이 그런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그것을 배우고 이해해야만 제대로 가치를 알고 누리고, 지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교육을 통해 모두가 배우게 합니다. 이것들은 추상이나 사변이 아닙니다. 역사 속 혁명의 피흘림과 사상들의 대결 속에서 세워진 것을 우리가 누리고 있고 있는 실제입니다. 교리가 그렇습니다. 교리를 배우고 전수하는 것은 목사와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어떤 방식의 기독교 신앙 추구보다 바른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그것을 습득하는 자에게 바른 경험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입니다. 교리야 말로 경험적이며 진실한 경험을 위한 기초입니다. 교리를 힘써 배우십시오. 물론 교리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패러디해서 교리공부의 부작용을 꼬집은 말이 있습니다. 원래 칼빈주의 5대교리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in the faith) 교리에 대한 어설픈 지식의 5대 부작용(TULIP) 1. 전적 지식주의 2. 무조건적 비판 3. 제한적 독서 4. 불가항력적 고집 5. 고립의 견인

 

   그러면 그 교리들 중 칭의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칭의가 필요합니까? 칭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상태, 옳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정죄, 저주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저주 아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제시하신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칭의, 의롭다함은 믿음으로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칭의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믿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이신칭의의 믿음을 일종의 맹목적인 확신으로 잘못 가르쳐서 성화없는 신자를 양산했다고들 비판하는데, 칭의를 얻는 믿음을 신자의 내면적 확신으로 오해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한 믿음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기시지만 ‘믿음으로’는 사실 ‘은혜만으로’와 실제적으로 동의어입니다. 물론 참된 신자에게는 확신이 있지만 확신의 강도가 구원에 보탬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확신(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마져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칭의교리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전가’입니다. 전가는 무관한 다른 대상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치 백성들의 운명이 한 군주의 판단에 달려 있어서 포로가 되거나 승리자가 되거나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전가’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칭의론에 있어서 잘못된 이단들로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아담과 우리, 예수님과 우리는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는데 연결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어떻게 전달되는지 유전적으로 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가 교리가 인간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냐는 반문들이 있어왔지만, 성경은 전가교리를 사실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가 전가된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죄를 짓고, 죄책감을 느끼고, 속입니다. 대표자 아담의 죄로 인해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가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전가가 믿어질 때, 의의 전가도 믿어집니다. 내 안의 아담의 죄가 고백될 때,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의의 전가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도 의를 잃을 때는 선악과를 먹는 행위 때문이었지만 그 의는 행위로 얻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불순종 가운데 의롭다고 하셨고, 이스라엘도 율법을 주시기 전에 구원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은혜로 의를 얻었기 때문에 우리도 은혜로 의를 얻어야 합니다. 참고로 이 두 번째 의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대표자,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이기도 합니다. 율법이 애초에 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가 교리 자체를 부정하고, 신자가 믿음을 가지고 행하면 그 안에서 의가 생산된다고 여기는 로마 카톨릭의 이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율법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원죄를 부정하고 전가와 칭의 개념 자체가 없는 펠라기우스 역시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적으로 은혜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와 원인제공 없이 넘어오는 전가를 믿더라도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전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인데, 전가에 의해서 죄인도 되고 의인도 되면 도대체 인간의 가치는 무엇이냐 그냥 하나님 편에서 다 하시는 것 아니냐고 혼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오해에서 극단으로 치우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은 일방적이고 막강하다는 이해를 가진 그룹 중 하나가 반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의 계획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집착 때문에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렇게 막강한 주권에 대한 신뢰를 하는 그룹 중 또 다른 하나는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인데 불특정 모든 사람에게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한편에서 이러한 막강한 주권 신뢰를 하는 그룹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막강하게, 비인격적으로 남용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을 인격적으로 자율적으로 창조하셨고,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에 협력하고, 또 분명한 믿음의 증거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룹이 펠라기안, 알미니안, 신율법주의입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독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와야 합니다. 첫 시작을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다면 불가능합니다. 창조가 그렇고, 계명으로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첫 시작만 하나님의 주권이고, 과정은 인간의 협력과 성취냐 그것도 아닙니다. 첫 시작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으로 시작되었고, 과정에서는 신비롭게도 사람이 참여하지만 그것은 보탬이 아니라 첫 시작, 처음의 원리를 재확인하는 영원한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니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거나, 수동적으로 살면 된다.’는 잘못입니다. 또 ‘하나님이 시작을 열어주셨으니 앞으로 우리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에 관한 잘못된 이해가 생겨나거나 칭의와 성화가 혼합된 견해도 생겨납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칭의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으니 열심히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성품의 변화 선행의 계발). 성화는 칭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확장되는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의지하기 위한 성화입니다. 성화의 성공여부는 도덕적이고 거룩한 나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더욱 확신하고 안심하기 위한 경험인 것입니다. 전가라는 인간의 지혜와 본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사랑과 영광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체하거나 보충하시기 위해 성도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심을 하도록, 칭의에 대한 확신을 주시려고 역사하시는 결과가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의 모든 선한 행위들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이거나, 이미 받은 의를 확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선한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칭의를 진정 믿는 성도에게는 선한 행위가 외적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성도의 구별된 탁월성을 보여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저렇구나 하는 증거요 고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 세상을 섭리하시는 도구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보이라는 것, 행함이 믿음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은 행위가 구원을 증명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참된 믿음인지를 행함이 보여준다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성화과정에서 신자의 도덕수준과 성숙은 나아집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행함은 그것을 행한 자신에게, 내가 여전히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더 크게 발견됩니다. 거기서 칭의에 확신이 생겨나는 것이며, 믿음이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도의 행함은 믿음을 견고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만큼 잘 믿는다는 것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행위가 믿음의 고백, 믿음의 증거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더욱 자기 의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칭의 확신이 아닌 참된 칭의를 기초로 하는 성화라면 성화는 칭의에 대한 확신을 더욱 깊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 십자가만을 붙잡아야 한다는 확신이 커집니다.


   그러한 성도에게는 자발적인 겸손과 약함이 변화와 성숙을 이끄는 기본 행동 양식이 됩니다. 그러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아버지학교, 성품학교 같은 프로그램으로 착한 행위를 유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 확신을 불어 넣어주기 위한 집회들을 연례행사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책임감과 소속감을 가지고 교회에 붙어있게 하기 위한 직분이 남용될 필요가 없습니다.


   참된 칭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면 다른 사람 보기에 신앙생활이 어떠하든지 행실이 어떠하든지 그 사람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통해 칭의가 과연 죄인을 살리는 교리이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법칙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은혜로 인해 자기가 계획하고 꾸미지 않은, 다른 사람이 일러주지 않은 변화와 성숙과 자발적 헌신이 시간 속에서 드러납니다.


    칭의교리는 한 마디로 복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칭의가 무엇인지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칭의복음이 인간의 본성상 칭의가 없는 실용적 복음과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피상적인 효과들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어떤 조건도 자격도 없이 그리스도의 공로가 나에게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복이고, 그것에 담긴 신비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영원토록 찬양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