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7-1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부활을 기쁜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부활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기쁜 소식인 것은 죽어도 다시 살 것, 영원히 살 것을 예상 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기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번 태어나면 영원한 존재가 됩니다. 죽더라도 모든 영혼이 심판대 앞에 서기 위해 부활하고,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그 영생이 질적으로 완전한 극단으로 나뉘지만, 부활 자체가 신자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진정한 기쁨이고 소망이 되려면 그 부활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는 부활이어야 합니다. 부활이 예수님과 관계있으려면 어떤 일이 있어야 합니까? 죽음도 예수님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해결하는 죽음을 통해 부활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죄를 해결하는 죽음을 통해 예수님과 연합하는 부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죽음은 병들거나, 사고가 나서 죽는, 수명이 다해서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 아닙니다. 그런 육신의 죽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도 영생한 자들, 영생할 자들이 있습니다. 에녹처럼 말입니다. 또 죽기 전에 주의 재림을 맞이할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에 육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지만 그래도 부활합니다. 새로운 육신을 입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옛것, 후패한 것을 벗고 새로운 것을 얻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된 부활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한다는 것입니다.둘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남은 생을 죽는 자로 살아갑니다. 복음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에서 자신이 죽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 회의가 생길 수도 있지만 자신이 어떻게 생명을 얻게 되었는가를 기억하면서 동일하게 죽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꺼이 하게 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증언합니다.
바울은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고통이 겪었습니다. 그러한 대적과 반대는 유대교를 비롯한 그리스도의 공동체 밖으로부터 오기도 했지만 자신이 섬기고 세운 교회로부터 오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자기 외부의 고통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의 고통인 질병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안팎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고백합니다. 7절에서 바울은 ‘질그릇’이라는 말로 그 약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질그릇 안에 보배가 있다고 말합니다. 질그릇과 보배는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찮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은 보배를 담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적절함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 보배가 7절 하반절에 있는대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의 육신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8절과 9절이 말합니다. 무엇 무엇을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당하는’ 4중 고통이 질그릇으로서 겪는 어려움이라면, ‘~아니한다’는 것들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의 4중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육신이 깨어지고 한계가 나타나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그것을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다”고 표현합니다. 무죄한 예수님을 죽였던 인간들의 그 죄성이 바울에게도 고통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바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고난이 예수님을 위한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자의 고통과 한계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고 그것은 다른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됩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우리와 너희도 살리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과 다른, 예수님의 부활 원리로 부활하려면 어떤 일이 있어야 합니까? 죽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인의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과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생기는 죽음으로 몰리는 고통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핍박과 고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잘못된 종교성 때문에 고립되고 고통을 받으면서 신앙으로 인한, 종교적 성취를 위한 핍박, 믿음의 증거라고 해석합니다. 그런 핍박과 고통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핍박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핍박은 자신의 종교성을 증명하기 위한 만족을 주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핍박은 정말 성도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며, 왜 나와 우리에게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있어야 하는지 의심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는, 빛을 가리려는 자들의 불만과 공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부활을 말하기 위해, 주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라고 말하려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들의 미움 때문에 죽어가면서, 그들이 자신의 실상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 죽음이 있는지, 죽음을 가져온 죄가 무엇인지,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죽음 이후에 더 극단적인 갈림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말해주는 것을 그들이 보도록,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어둠이 빛을 부각시키듯, 어두운 죽음이 빛 된 생명이 어디 있는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죽음을 인정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번 주에 있었던 세월호 침몰 사건에 있어서도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너무 괴롭기도 했지만, 더 고통스런 것은 목격되고 밝혀지는 사실들입니다.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문제를 방치했고 방치하는 일들, 살 수 있는 자들을 죽이는 일들,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숨기고 뭔가 거짓된 희망을 제공하려는 척 일하는 것들이 드러난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자기 이익, 자기 생존, 권력 창출을 위해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죽음을 감추거나 외면하여 이용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존과 확장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죽음마저도 이용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정말 침몰하는 배와 같습니다. 육체가 죽어 모든 것이 끝나면 차라리 낫겠지만 그 죽음 이후에 진짜 죽는 일, “정녕 죽으리라”의 일이 있습니다. 죽지 못하고 영원히 고통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그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가면서 우리 눈으로는 육체의 부패를 보고, 우리의 양심으로는 죄를 더욱 깊이 깨닫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죽음이 얼마나 감사한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질그릇 같고, 부패한 육신을 영원히 짊어지지 않고, 언젠가는 끝내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함, 죽음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분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을 소망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임을 알 때,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과 부활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을 고대합니다. 그 때에 부활을 제대로 소망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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