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으려면(마태복음 18:21-35)

따뜻한 진리 2014. 1. 26. 22:17

 

마태복음 18:21-3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당시 유대 관습에는 세 번 용서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그에 비해 많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정도면 좀 칭찬 받을 만하겠지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질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칠십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는 예상 외의 답변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어떤 이야기 하나를 하셨습니다.


   어떤 주인에게 1만달란트 빚을 진 종이 있었습니다. 1만달란트는 헬라어에서 최대의 숫자와 최대 단위의 화폐단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종이 살려달라고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주인은 놀라운 은혜를 베풉니다. 주인은 그 종의 빚을 면제해줍니다. 이 엄청난 은혜를 입은 종이 이번에는 자기한테 빚진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 친구가 얼마를 빚졌는가 하면 1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품삯입니다. 그러니까 100일치 품삯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그 100데나리온을 못 갚자 감옥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1만달란트 탕감해준 주인이 종을 다시 감옥에 가뒀습니다.


    주인이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난 빚을 없던 것으로 해주었는데, 왜 이 종은 자기가 면제받은 1만달란트에 비하면 아주 적은 금액인 100데나리온의 빚을 없애주지 않았을까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진 빚의 크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 달란트 빚진 종은 충분한 시간과 노력만 기울이면 자기 빚을 청산할 수 있다고 착각했을 수 있습니다. 본문 26절에서도 종은 자신이 ‘다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제자들이 들었을 때 만 달란트라는 금액의 크기에도 놀랐겠지만 그 종이 다 갚겠다고 하는 것도 어처구니 없는 말로 여겼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종이 갚겠다고 말한 것으로 비유를 이야기 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종이 생각하기에 면제해 준 분량이 엄청난 금액이긴 하지만 주인에게는 별 것 아닐 것이라는 종의 자의적인 판단 때문입니다. 주인이 그만한 능력이 되고, 대단하니까 엄청난 채무를 면제해 주는 것이겠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과분한 은혜를 베풀정도면 다른 것들도 다 이해해줄 수 있겠다고, 앞으로 발생하는 문제도 넘어가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분들을 경제적으로 도울 때 고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니들은 돈이 많으니까 이 정도는 별 것 아니잖아’하면서 미안한 마음과 감사를 불만으로 덮어버리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심적 부담은 버리고 이익은 누리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주인의 선함, 그것을 결정한 주인의 생각과 마음보다 그것을 이해하는 자신의 판단을 우위에 두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능성은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입니다. 내게 베풀어지는 혜택과 용서는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입어야 하는 손해, 인내해야할 일은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마지막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즉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일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 비유와 같다는 것입니다. 즉 만 달란트 면제 받은 종에게서 일어난 일이 우리와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지체들과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만달란트 면제받은 종처럼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죄가 어떻게 다뤄지는지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위의 세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만달란트 빚진 자가 자신의 빚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가 필요한 자인지, 얼마나 큰 용서가 필요한 자인지도 모르면서 용서받았다, 은혜 받았다고 쉽게 믿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용서 받기 위해서 치러진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엄청난 죄를 해결하신 하나님이 무한하신 사랑이시고, 무한하신 능력이시라고 해서 우리의 죄를 간단하게 없던 것으로 여기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셔야 했고, 성자께서는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의 무거움과 비참함을 지고 사시다가 참혹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무게로 책임지셨습니다. 비록 우리는 죄의 무게를 지지 않지만 은혜의 무게(오늘날의 설교들이 빚진 신앙으로 그것을 설명하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에 빚진", '은혜에 빚진"것이 아닙니다. 그 빚은 사람 편에서 갚아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상당수의 현대 교회들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하나님의 용서, 복음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다 해결해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 된다는 식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행복하게 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자의 불편한 죄책감을 간단하게 해결하려는 구원파 이단의 신앙입니다. 설명과 이해는 다르지만 동일한 적용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상충됩니다.

 

   셋째, 성령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셔서 자신이 가증스런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도 다른 지체를 용서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죄를 통해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지도록 훈련을 받게 됩니다. 성도는 단번에 용서받은 것을 믿지만, 처음 한 순간 깨달음으로 자기 죄에 대한 크기와 깊이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의 크기를 다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사는 동안 더욱 깊이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왜 필요한지를 더욱 크게 깨닫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받은 죄 용서의 규모에 대한 인식이 날이 갈수록 커집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용서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는 않지만 갈수록 익숙한 일이 됩니다. 넉넉한 일이 됩니다.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고, 은혜를 얻어야 하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안 베풀수 없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