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바로의 태도 (출 7:8-11:10 ②)

따뜻한 진리 2018. 9. 16. 20:01

출애굽기 7:8-11:1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지난 시간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열 가지 재앙 중에 나타난 바로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바로의 하나님에 대한 반항은 사탄의 모습이고, 세상의 모습이며, 우리에게도 있는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뭔가 변하는 것 같고, 반응하는 것 같지만 완악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는 자신의 주술사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고, 물을 피로 만들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개구리 재앙 때부터 고통을 당할 때마다 바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겠으니 재앙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시자 바로는 약속을 어겼습니다.

 

    재앙의 막강함에 신하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에도 바로는 강퍅했습니다. 세 번째 이 재앙 때 주술사들이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바로에게 고백하고, 여섯 번째 재앙에서 주술사들마저 피부병에 걸리고, 일곱 번째 우박재앙 때에는 신하들이 하나님의 경고대로 미리 피하기도 했지만 바로는 여전했습니다.

 

    물론 뒤로 갈수록 재앙으로 인한 고통이 커지자 바로가 조금씩 허용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합니다. 네 번째 파리 재앙 중에는 멀리 가지 말고 이 땅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라고 말했고(8:28),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 중에는 성인남자들만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했고(10:11), 아홉 번째 흑암재앙 중에는 모두 가도 좋으니 양과 소 같은 가축들은 가져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10:24). 하지만 그것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주겠지만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는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안에 가두어 두려고 했다가, 다음에는 가더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광야로 멀리가지 못하게 했고, 다음에는 가족들을 애굽에 붙잡아 두어 다시 돌아오게 만들려 했고, 다음에는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데 필요한 자원인 가축들을 붙잡아 두려고 했습니다. 바로는 어떻게든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바로는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여호와의 말씀이 귀에 들려도 여전히 현실은 애굽이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또 혹시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다시 애굽의 삶으로 돌아오도록, 애굽에 있는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발목이 잡히도록, 하나님을 위해 드려야 할 것들을 애굽에서 소진하고 탕진하도록 해서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여호와의 것이 되지 못하도록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이 세상을 사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아도 사탄은 그를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교인이 되게 하거나, 세상이 더 즐겁고 안락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육체적 영적 자원을 세속적인 것에 낭비하게 만듦으로써 여호와께는 빈껍데기만 형식적으로 표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또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반성하는 듯 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일곱 번째 우박재앙 중에 바로는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악하도다(9:27)”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진 메뚜기 재앙 때는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10:16)”라고 바로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본문 7장부터 11장 사이에서 바로의 마음 상태에 대해 묘사하는 단어인 완악9회 사용되고, ‘완강이라는 단어도 5회나 사용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로의 고집은 대단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대로 백성을 보낼 듯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듯해도 위기가 지나가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수차례 반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바로의 그런 상태가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본문이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실 때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실 것(4:2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바로의 완악함이 드러날 때마다 여호와께서 그를 완악하게 하신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대로라고 본문은 계속 확인시켜줍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짓게 하시는 불의한 분이라고 비난받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일부러 그렇게 움직이신 것이 아니라 내버려두신 것(유기)이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인간은 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푸시든지, 내버려두시든지 하는 것도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에 우리의 부족한 이해로 하나님의 그런 처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의 악을 조장하시는 분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어도 성경이 하나님께서 악인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같은 완악한 자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집과 반항이 신기할 정도로 집요한 것을 설명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부인할 수 없는 경험을 해도 굴복하기보다 오히려 자존심을 더 지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확실하고, 자신이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지옥에 갈 것을 알게 되어도 믿지 않고 순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버티는 것이 인간입니다. 죄는 무서울 정도로 인간을 무지하게 만들고, 고집스럽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증오와 자기 자존심 속에서 멸망을 선택하는 것이 멋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신자가 되어도 순종보다 여전히 자기 연민과 자기 권리를 우선시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자신에 대한 집착은 가히 신적입니다.

 

    바로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맞서는 신, 우상의 모습입니다. 실제로 바로는 애굽의 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예들을 잃지 않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시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든 것입니다. 바로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지라도, 내가 당연히 누리던 것을 모두 다 내려놓게 될 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충분하게 여길 수 있습니까? 나의 소유, 나의 권리로 생각되는 것들, ‘이 정도는 내가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위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여겨지는 것마저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아니면 바로처럼 하나님을 나의 것을 빼앗아 가는 악한 존재로 여길 것입니까?

 

    본문은 열 가지 재앙 속에서 바로의 완악한 태도와 고집스런 변덕을 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바로처럼 계속 등장하지만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바로 모세입니다. 그가 계속 등장하는데도 왜 눈에 띄지 않습니까? 패턴을 벗어나지 않고, 일관된 모습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 패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끈질기게 반대하고, 못하겠다고 하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묵묵히 수행합니다. 완악한 바로의 모습을 보면서 지치거나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순종했습니다. 어느새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자는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완악해졌고, 어떤 자는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순종하는 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