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1-2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1장과 2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모두 죄인임을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창조세계의 증거와 양심을 거스르면서 우상숭배를 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종교와 율법을 가지고 자기숭배,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양심의 법을 가진 자든, 율법을 가진 자든 인간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율법을 주셨는데도 지키지 못한 자기 죄를 슬퍼하고 더 겸손하게 구원을 사모해야 하는데, 율법이 구원에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율법의 도움을 받아야만 구원이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도 율법을 지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거나,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하기 위함이고, 순종하기 위함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순종은 불안 때문이 아니라 거듭난 자가 성령에 의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계속 구약적 동기를 가지고 율법과 할례를 붙잡고, 그것을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요구했습니다. 자기들도 실패한 것을 이방인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그런 용도가 아니라고, 율법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고,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논리를 공격했습니다. 바울의 주장대로 율법의 혜택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심판 받는 것이라면,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다면, 즉 유대인이 율법 안에서 구원을 보장받지 못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하게 여겨주신다는 약속을 못 지키는 불의한 분, 무능한 분이 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었던 것입니다(3절). 4절에서 바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일한 기준으로 심판하시는 것도 정당하고, 구원하시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특권이 사라지는 것 같아 실망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특권은 이방인과 차별된 특별한 구원을 얻는 것에 있지 않고, 책임을 부여 받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섬길 기회를 주신 것이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먼저 부르신 것은 그들만을 특별하게 하고, 그들을 자랑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세상 속에서 구별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공의와 구원하시는 은혜를 모두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의 죄를 통해 인간의 죄가 얼마나 교묘하고 사악한지를 드러내시고, 심판으로 자신의 공의를 드러내시는 동시에 이 두 종류의 죄인들을 구원하시면서 자신이 성실하게 은혜를 베푸는 분이라는 것도 풍성히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은혜 베푸는 것도 정당하고, 심판하시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심판하시고, 구원도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런 가르침에 또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바울은 당연히 예상한다는 듯 그 반론을 5절부터 8절에서 말합니다. ‘바울 너의 말대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으로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된다면, 그럼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데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말이 되느냐?’ 또 ‘하나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가 더 죄를 저질러야 하겠네?’라는 잘못된 논리와 비방으로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이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 심판하시고, 또한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사랑을 드러내시는, 해결하시는 두 가지를 모두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 둘 중 어느 한쪽도 손상되지 않도록 완전히 실행하십니다.
이어지는 9절부터 20절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다시 한 번 성경을 근거로 말합니다. 그 내용들은 대부분 시편과 이사야에 나오는 표현들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알아도 외면합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과 신체 부위들은 하나님을 추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위해 민첩하기보다는 죄를 탐닉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일에 부지런합니다. 이러한 인간들은 참된 행복을 얻기보다 고생하고 멸망을 향해서 갈 뿐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오직 자신의 이익과 쾌락만 추구하면서 자기를 신성시하고 결국 파멸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죄인은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저지르는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깨닫도록 1장부터 우리를 코너로 몰아온 것입니다. 19절이 말하는 대로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도 회피도 하지 못하도록, 오직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역사, 쌓여 온 전통,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들이 주는 특별함 때문에 할 말이 많고, 자기들이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더 높여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인이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의에 대해 자기중심적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런 것과 유사하게 이 세상은 죄인 답게 침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주장을 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심판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진정 공의로우시다면 단지 예수를 안 믿는다고 지옥에 보내실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약간의 잘못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끔찍한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판단, 심판 아래에 자신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의 판단 아래에 두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판단할 자격이 있으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시는, 어떤 오류도 없으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물려받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비방할 수 없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악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는 분명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가 생각하기에도 분명 죄인이고, 서로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는 하나님의 심판이 옳음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래서 살아계시는 하나님,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자는 바울이 의도한 대로 입을 막고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판단 만을 기다리는 자가 됩니다. 그렇게 감히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음을 아는 자야 말로 자기에게 걸맞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길 것이고, 용서하시고 새롭게 해주시는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고, 겸손하게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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