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2:6-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은 1장의 첫 장면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합니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 즉 모든 시작을 있게 하신 분이시고 모든 역사를 끝마치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 의존해야 할 분으로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진실하게 나오는 자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의 종말이 언제든 갑작스럽게 닥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이미 오신 분이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에게 오셔서 함께 하셨기에 우리에게도 항상 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어른이 되는 것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나면 인생이 화살처럼 지나가고 짧다고 여기는 것처럼, 예수님이 오시는 종말의 순간은 그 때를 기다리는 성도에게 오랜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막상 예수님이 오시면 그 때까지의 시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때부터 줄곧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 후 여자가 낳은 자가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아들, 어린양, 참된 왕, 인자로 일컬어진 한 분을 줄곧 기다렸습니다. 그 백성들은 고난 속에서 인내해야 했습니다. 합당한 제사를 드린 아벨은 죽임 당했고, 홍수 때에 의인이라고는 노아만 남았고, 엘리야 한 사람이 850명의 우상숭배자들을 상대해야 했고, 다니엘과 세 친구는 죽음의 위협을 당해야 했던 그런 고달픈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계속 자기만을 바라보고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기다리는 그들에게 임하셔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항상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이셨지만 어느 때보다 예수님이 몸을 입고 오신 그 때가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려 오시는 것이 모든 피조물들의 기다리는 바였고, 영광스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말한대로 오랜 기다림 속에서 예수님이 눈에 볼 수 있게 분명 오셨기 때문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마침내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한 번 이 땅, 이 역사 속에 오셨기에 마침내 또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결정지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 전체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을 우리가 기다리게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창조의 목적,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유일한 존재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시선, 마음을 고정하고, 간절히 바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죄성이 남아 있는 이유 역시 끊임없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붙잡고 의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날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기다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의 관심과 소망이 하나님께 고정되어서 바라고, 기다리고, 의존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환상에는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영광 돌리는 장면이 항상 나왔던 것입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도,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의 구원과 위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핵심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나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것,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 천국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 성령의 능력을 뜨겁게 경험하는 것, 나의 삶이 이전과 다르게 밝아지고 활력이 넘치는 것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나의 그런 것들이 참된 신앙 안에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보다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사이비 집단, 이단들, 빈약한 복음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교회들, 이런 집단들과 참된 기독교의 차이점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런 집단들은 부차적인 것을 가지고 흥분하고, 자랑하고, 너한테는 없고 나한테만 있다고 교만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겸손한 태도와 두려움이 없습니다. 천박한 자랑과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을 주셔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을 얻습니다. 목사나 다른 신자들이 나를 칭찬해주고, 나의 신앙의 능력이 빛을 발하고, 나를 통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지라도 참된 성도는 그것으로 흡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문제와 이 땅에서의 시련이 예수님 앞에 설 때에만 해결되기 때문에 그 때를 고대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지지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 자신만을 바라보고, 위로를 얻으며, 영광을 돌리고, 만족을 얻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집중력과 관심을 흩어 놓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 그 과정에서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때를 인내하고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 믿는 자는 끝까지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바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세상 끝까지 모든 육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 믿음의 선진들과 지금의 우리와 미래의 구원받을 성도들까지 모두 인내하면서 예수를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다른 헛된 것들의 유혹에 한 눈을 팔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 따르는 자들, 이마에 인침을 받은 자들이라는 표현들을 통해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들은 예수를 닮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성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우리를 닮은 존재로 여겨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와 성도가 동일시 여김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외롭고 고생스러울 수 있습니다. 계시록 6장에서 성도들을 의미하는 죽임당한 영혼들이 외쳤던 내용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으셔서 저희들이 계속 고난당하는 것을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말한 것처럼 이 기다림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님을 기다릴 것입니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기다리기 때문에 다른 길 가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갈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오십니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나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창세 이후로 오랜 시간동안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적이 없는 상태로 기다리면서 고난과 시련을 감당하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정말 오실까’하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들은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후의 시간들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더 잘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영리 목적으로 설교를 스크랩, 캡처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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