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6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했지만 사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채로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이 그렇게 된 것을 매우 슬퍼했습니다. 앞의 15장에서 하나님이 사울에 대한 실망을 드러내실 때 사무엘은 밤새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본문 1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네가 그를 위해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요구대로 인간왕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했기에, 사울의 계속되는 불순종을 보며 “거봐라,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어”라고 생각하며 아쉬워 할 것 없는 태도를 보일 만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생존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 실패를 보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위에서 살폈던 대로 너무나 슬퍼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무엘이 왕을 주신 하나님의 결정을 매우 존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며 그런 뜻이 허락된 사울이라는 사람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에 비해 인간 왕이 쉽게 무너지자 안타까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죄의 대가를 마땅히 치러야 할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진심으로 마음을 쏟는 일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 모습, 또 사무엘이 밤새 기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무엘에게 새로운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울의 왕권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다른 왕을 세운다는 것을 그가 알면 사무엘을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세울 때처럼 정치, 종교적으로 중요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매년제라는 가족을 위한 제사 자리로 이새의 가족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새의 첫 아들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나타났을 때 사무엘은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외모를 보지 말라고 자신은 마음 상태를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함께 온 이새의 일곱 아들을 차례로 다 사무엘 앞에 세웠지만 하나님께서 모두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이새에게 여기 함께 온 아들이 전부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새는 막내가 하나 있는데 양을 돌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그 막내가 올 때까지 먹지도 않고 기다립니다. 드디어 보냈던 사람이 막내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얼굴 혈색이 붉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녀서 잘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막내 아들이 기름 부을 자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이후로 하나님의 영이 다윗을 주장하셨고, 사무엘은 고향 라마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이 주장하셨지만 사울에게서는 하나님의 영이 떠났고, 악한 영이 그를 괴롭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울이 귀신들린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과 동시에 사울은 그것을 빼앗긴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사람이 설명할 수는 없는 불안과 공허함, 버림받은 영적 상태를 실제로 경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의 신하들은 그런 사울왕의 상태를 음악으로 호전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금을 잘 연주하는 사람을 구했는데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연주가 효과가 있었는지 사울은 상태가 많이 좋아졌고 다윗을 많이 의존하고 신뢰 하게 되어 자신의 무기를 드는 자, 즉 보좌관 정도의 위치로 세웠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마치 모세가 왕궁에서 지도자의 수업을 받은 것처럼, 사울 가까이에서 왕으로서의 리더십을 보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사울은 세워진 권력에 의해 자리를 지키고는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약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실 때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흔히 외모보다는 마음상태, 태도를 하나님이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고,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을 선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다윗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개입 없이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직접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선택된 두 사람 모두 외모가 매우 강조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외모를 중시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왜 선택된 인물들은 외모가 특출한 것입니까?
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용모”는 전체적이 몸의 모양새를 말합니다. 물론 얼굴도 포함하지만 전체적인 신체의 비례와 균형 속에 얼굴의 형태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즉 중요한 것은 몸 전체, 신체조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이 사울의 외모를 묘사한 것과 다윗의 외모를 묘사한 것이 다릅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때는 그의 키가 두드러지게 컸다는 것을 반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9:2, 10:23). 다윗은 얼굴이 강조됩니다. 다윗의 얼굴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상태가 표현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신체조건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신체 조건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후보명단에서 애초에 제외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울 때 용모를 보지 말라 하신 것은 신체조건을 보고 왕을 세우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신체조건을 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옛날로 갈수록 한 나라의 지도자, 왕의 주 임무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군사들, 백성들의 사기와 전투력은 왕의 신체조건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왕을 하나님 이상으로 의지하지 않고, 왕도 자신을 의지하지 않도록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고, 의지할만한 외적 조건을 가진 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가치를 담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단지 다윗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이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육체적으로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다루는 여러 영화들이 예수님을 군중 속에서 드러날 만한 키와 매력적인 백인남자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린 나귀를 학대하시면서 억지로 겸손하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에 어울릴 만큼 크지 않은 신체조건을 가지셨다고 여길만한 증거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의 겉모습은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매력을 갖지 못하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가치 없게 여기는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한 귀한 분임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스럽고 극악하게 죽임 당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눈으로는 그분에게서 선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이 쉽게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진실인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겠구나, 사람의 힘으로는 가망이 없겠구나, 하나님이 아니면 방법이 없구나’를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한 것을 생각지도 못할 것에 숨겨두셨습니다. 아비의 안중에 들지 못한 볼품없는 막내 다윗이 이스라엘을 한 왕국으로 세웠던 것처럼,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세상이 버린 예수님이 우리를 살려서 하나님 나라로 이끄십니다. 이런 복음의 비밀을 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에 사람들이 쉽게 호감을 느낄만한 것을 첨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보기에 매력이 없는 십자가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품없는 것에 담겨진 그 복음, 이 예수님이 우리를 살립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회피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과 비교할 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름다운 분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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