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웃사의 죽음을 통한 경고 (사무엘하 6장)

따뜻한 진리 2020. 11. 8. 22:05

사무엘하 6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에는 백성들과 다윗 사이의 언약이 중심내용이었다면 오늘 본문 6장은 다윗이 언약궤(십계명, 지팡이, 만나항아리)를 다윗성에 안치하는 내용입니다. 사무엘상의 앞부분에서 언약궤는 어린 사무엘이 등장한 장소인 실로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이기기 위해 언약궤를 사용했지만 졌습니다. 승리한 블레셋은 빼앗은 언약궤로 인해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겪었고, 블레셋은 언약궤를 이곳저곳을 옮기다가 결국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70년간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울이 등장했었고, 다윗이 왕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려고 했습니다.

 

    새로 만든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운반하던 중 수레를 끌던 소가 날뛰어 언약궤가 땅에 떨어지려하자 언약궤 운반을 책임졌던 웃사가 언약궤를 손으로 잡았습니다.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져오는 일은 거기서 중단되었고, 두려움 때문에 3개월 동안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다윗은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었던 오벧에돔의 집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언약궤를 사람들이 직접 어깨에 메었고, 여섯 걸음을 걸었는데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감사했는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백성들은 기뻐했고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국적 행사가 마무리되고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윗의 아내인 사울의 딸 미갈은 앞에서 다윗이 춤추다가 맨살이 보였던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당시 춤은 주로 여자들이 추었는데, 그런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천한 여자들이 다윗을 우습게 여겼을 것이라고 미갈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라는 말은 다윗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그런 미갈의 말에 다윗은 ‘당신 눈에는 내가 거슬려 보였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천한 여자들에게는 오히려 좋게 여겨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낮아짐이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일로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그 불임은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기 보다는 다윗이 더 이상 미갈을 아내로 찾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약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큰 사건인 웃사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웃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죽임당한 것입니까? 웃사가 언약궤를 지키려고 한 것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잘못으로 여기셨을까요? 그 죽음은 웃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그리고 다윗의 책임을 묻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는 일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적인 행사로 의도했습니다. 다윗은 그 일에 3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한 일은 그동안의 전쟁에서도 없었던 일입니다. 또 다윗은 법궤를 소들이 끄는 수레에 실어서 옮기려 했습니다. 그 방법은 앞에서 블레셋이 언약궤 때문에 저주를 받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 사용한 방법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새끼가 있는 암소가 수레를 끌게 해서 이스라엘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방법을 이스라엘이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에 그 방법을 허용하셨으니 다윗은 자신들도 그 방법대로 하면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법궤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직접 운반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레위의 둘째 아들 고핫 자손이 성막의 기물들을 맡아서 옮기는 역할을 했는데, 그 고핫 자손 중에서도 막내 웃시엘의 자손들이 어깨로 메고 운반해야 했습니다(민3:31). 이런 요건에 따라 법궤를 옮길 수 있는 사람이더라도 법궤의 본체에 손을 대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도 법궤를 메고 움직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언약궤에 관한 규칙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 그 기준들을 검토하기보다 언약궤가 별 탈 없이 다루어졌던 블레셋의 방법을 그대로 빌려오는 것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물론 다윗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닐 수도 있고, 신하들이나 백성들의 제안으로 그렇게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렇게 결정을 내려 진행시켰고, 그 과정에서 웃사도 그 언약궤 이동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 효율성의 원리, 실용적 가치에 따라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소들의 흥분 때문에 생긴 웃사의 행동과 죽음도 단지 웃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다윗은 웃사가 죽었을 때 두려워했고, 자신의 잘못인 줄 알고 반성한 것 같습니다. 그는 엄연히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인간적 지혜를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벧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가져올 때는 사람이 메고 오게 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실패한 후 사람의 힘으로 왕의 자리를 견고하게 하고,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의 그런 실수는 사울이 제사를 가지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 것을 답습하는 것이지만 사울과 달리 다윗은 잘못을 깨닫고 바로 잡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춤은 단지 기분이 좋아서 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한 행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그럴듯한 쇼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의 역할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이 언약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보냈을 때는 내버려두셨지만 다윗이 그런 일을 주도했을 때는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웃사를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는 다른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세에 있어서 다르길 원하십니다. 이 세상이 생존하는 방식, 발전하는 방식을 교회가 따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게 어떤 일을 허용하신다고 해서,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이 어떤 방법으로 잘 된다고 해서 함부로 그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존, 성장, 효율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으로서 인정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 둘 다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가 봐도 악한 일을 당연히 금해야 하지만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일도 주의해야 합니다. 좋아 보이고 가시적인 결과들이 쉽게 얻어지고, 사람들의 호응과 활력을 얻을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교회 역시 다급하면 효과가 있는 방법들에 손을 뻗습니다. 외적인 것과 사람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교회 안에 모여 있는 우리는 서로의 평가가 두려워서 인간적인 방책을 쓰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만약 소들이 날뛰었을 때 웃사가 언약궤를 만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가만히 있었다면 어떤 일이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이 웃사를 멋진 행사를 망쳐 놓은 무책임한 인간이라고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언약궤를 그런 식으로 옮기는 것을 허용한 장본인이 다윗이기 때문에 다윗이 직접 웃사를 징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서로의 시선과 평가와 압력이 신앙과 교회를 오염시키는 인간적인 개입을 유발합니다. 목사가 성도와 장로들을 두려워해서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효과를 얻기 위한 방법을 찾기 쉽습니다. 우리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그러한 유혹은 순간적으로 쉽게 정당화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정치적이고 인위적인 노력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윗이 동원한 수만 명의 대열 속에서 언약궤를 소들이 끄는 수레로 옮기는 것이 멋지게 보였을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메고 가야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방법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신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구원을 점검하는 일에 있어서 그렇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그렇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일에도 그렇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그렇습니다.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기회를 잡고 싶은 조바심이 생겨도, 무능하고, 어리석다는 평가가 따를지라도 이미 명시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말씀으로 밝혀 놓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을 연구하고, 깨닫고, 지키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