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언약으로 보는 성경(10)- 모세 언약

따뜻한 진리 2021. 3. 28. 20:46

 

 

출애굽기 19:1-8, 신명기 31:14-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그의 후손들은 애굽에 있는 동안 매우 많아져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붙잡아두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과 안식일 규례와 도덕법과 제사법과 성막에 관한 규례들을 주셨고, 이스라엘이 그것들을 잘 지켜야 약속된 가나안 땅에서 현세의 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언약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행위언약이었습니다. 이후 구약역사는 이 모세언약 안에서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40년간의 광야생활 동안은 물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 언약을 계속 위반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모세언약을 위반한 것을 계속 고발했고,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모세언약이 있기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은혜언약이었습니다. 이 은혜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언약이었고, 오직 믿음 외에 어떤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 말 그대로 은혜로운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맺으신 모세언약은 행위언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이 행위언약은 이스라엘이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즉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언약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계속 구원하셨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 계속되는 불순종과 우상숭배 속에서 반복적인 징계를 받았고, 결국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뒤늦게 율법을 열심히 지키겠다고 생각해서 율법주의적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율법, 즉 행위언약 아래 두신 이유는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언약을 잘 지켜서 보장받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현세적인 복이었습니다. 모세언약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도 영원한 생명, 즉 진정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언약은 은혜언약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은혜언약은 변함없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행위언약을 맺으셨을까요? 모세언약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바울이 지적한 문제가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다른 변화와 발전이 있어야 구원이 확실해진다는 주장에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성도들이 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보면서 도덕적 삶이나 눈에 보이게 달라지는 무엇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물론 진정한 성도는 끊임없는 회개와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사람의 달라짐이나 그럴듯한 변화에서 찾고 안심하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듯 교회들의 윤리적 실패들이 심각해질 때 믿음 외에 다른 것을 붙잡으려는 유혹이 강해집니다. 교회가 오직믿음, 개인구원을 강조한 것이 부도덕한 신자들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습니다. 믿음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점점 커집니다. 성도들이 도덕적이고, 착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게 하려면 다른 동기가 필요하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착하고 헌신하는 성도, 도덕적인 교회들을 만들기 위해 복음을 왜곡시키는 일이 항상 있었는데,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행위언약 아래 있었던 기간을 교묘하게 왜곡해서 근거로 삼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구원받은 이후에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거듭난 이후에 계속 은혜를 얻기 위해 행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우상숭배가 가득한 가나안 땅을 정복할 사명이 이스라엘에게 있었듯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화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시작이고 가능성일 뿐 우리 자신의 도덕적인 삶과 공로와 충성으로 최종심판을 통과해야 하고, 그것에 실패하면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갔듯 지옥에 갈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그런 이해가 신자의 도덕적인 변화와 역동적인 신앙을 만들어내는 동력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논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을 허물어버린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교회들의 부도덕함에 실망한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는 성도들의 윤리적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자신들의 헌신으로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한다는 자부심을 품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오해한 것입니다. 모세언약을 통해 인간 행위에 절망하고 복음을 더 붙잡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버리고, 사람의 행위로 구원의 확신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을 좀 치장해서 스스로 안심하고, 세상이 보기에도 교회를 괜찮게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공로주의적 발상이고,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그럴듯하게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말한대로 율법이 초등교사가 되어서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이 복음의 원리, 즉 죄를 들춰내신 후 용서와 생명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방법을 부끄럽게 여기고 무능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언약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태초에서 종말까지를 담는 모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담의 위치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태초의 흑암과 무질서 상태와 같았던 애굽에서 나왔고, 수면 위를 운행하신 성령과 함께 갈라진 홍해를 건넜고, 높은 산 에덴에서 아담을 만나신 것처럼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아담이 하나님과 선악과를 두고 행위언약을 맺었듯 이스라엘은 율법을 두고 행위언약을 맺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열방에 반사하고 발산해야 했듯이 국가로서의 이스라엘도 아담처럼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했습니다. 아담을 둘러싼 에덴이라는 성전이 그런 임무를 말해주었듯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던 성막이 이스라엘의 임무를 잘 보여줬습니다. 에덴이라는 성전 안에서 아담이 선지자, 제사장, 왕의 역할을 해야 했듯, 이스라엘에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아담에게 주어진 명령과 유사하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과 가나안을 통해 현세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모세언약에 실패해서 가나안에서 추방되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행위언약에 실패해서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유사합니다. 신명기 4장과 우리가 읽은 31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아담의 실패까지도 닮을 것이 예상될 만큼 이 두 주체는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우리에게 교훈을 준 것입니다. 행위언약의 당사자였던 이 두 주체들의 실패는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바로 아담이 자신의 실패로 여자의 후손을 기다렸듯이 이스라엘의 실패도 하나님이 준비하실 아들을 겸손히 의지하게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첫 번째 아담과 이스라엘의 계속된 실패는 왜 예수님이 둘째 아담이자 참 이스라엘이 되시는지를 알게 합니다. 아담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 공로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아담의 한계와 비참함이 이스라엘을 통해 반복되고 확장되면서 은혜언약의 근거이신 예수님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봉사한 것입니다. 율법이 복음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세언약-행위언약 아래 두신 것은 이후의 교회들에게 이스라엘처럼 실패하지 말고 잘 좀 노력하고, 행함으로 구원을 완성하라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현세적으로 맛보게 하는 가시적인 모형이었지만 그러나 인간이 다스리는 세상의 어떤 나라도 참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 사람 아담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힘을 모아 나라를 이루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고, 구원을 이루고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깨뜨립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들었던 창세기 내용, 즉 심판받을 수밖에 없었던 아담과 가인의 후손들과 바벨도시와 홍수로 심판받은 세상이 남 얘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현실임을 경험하도록 행위언약 아래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런 절망을 통해 은혜를 갈구하도록 그리스도를 갈망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또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 앞에서 아담의 실패가 이스라엘의 실패였듯, 또한 우리의 실패를 이미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 죄를 스스로 깨달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지적과 경고에 대해서 기분 나빠하면서 자기 문제는 자기가 직접 경험해서 깨닫겠다는 태도들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자기 단점과 문제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마저도 자기 공로로 삼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실수를 통해 더 깊어지고 겸손해 질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지금 이런 상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아담과 이스라엘을 통해 반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미 아담에 이어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신 인간의 실체, 세상의 실상이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속히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럴듯한 멋진 삶으로 공로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은혜를 의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칭송하는 것,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창조와 구원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존재의 목적이라면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언약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아담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있었고, 십자가 복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