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욥기강해 (2) 욥기 2:7-13

따뜻한 진리 2021. 5. 9. 23:30

욥기 2:7-1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의 1장과 2장에서 욥기 저자는 ‘욥과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 떠난 자가 없다’라는 말을 세 차례 반복하면서 욥의 고난이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닌 무고한 고난임을 분명히 알리고 있습니다. 욥은 자녀와 재산을 다 잃고, 이제는 온 몸에 악한 피부병이 생겨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영화 Cast Away를 보면 무인도에서 홀로 생존하는 톰 행크스가 배구공 윌슨을 친구로 삼은 것처럼 고독한 욥은 고통스런 피부를 긁어낼 깨진 그릇조각을 친구 삼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욥의 가족 중에 아내가 살아 있었습니다. 욥과 아내는 함께 고통을 겪었습니다. 욥에게는 재난이 두 번에 걸쳐 일어났는데, 먼저 일어난 자녀들의 죽음과 재산을 잃은 일은 욥과 그 아내가 동일하게 겪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일어난 욥의 육신적 고통은 욥에게만 일어난 일이지만 그의 아내는 집안이 완전 망한 상태에서 참혹한 남편을 옆에서 돌봐야 했으니 고통이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욥의 아내는 고난 속에서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남편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아야 하지 않겠냐며 입술로 범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욥은 괴로웠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고통을 참아내고, 감내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뱀이 여자를 통해 아담을 넘어뜨린 것처럼, 여기서도 욥의 아내는 욥이 하나님을 버리도록 시험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앞에서 반복된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 떠난 자’라는 칭찬에 걸맞게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는 경건함을 보여줍니다.

 

    욥의 육신적 고난은 며칠 정도가 아니라 최소 몇 달에서 몇 년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아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처럼 질병이나 사고를 당한 사람이 나의 가족이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사람을 지속적으로 가까이 하고 돌보는 것은 지치고, 괴롭고, 기쁨을 잃게 되는 고된 일입니다. 욥의 아내는 지쳤고 욥의 곁에 있었지만 욥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욥은 고독했습니다.

 

    그런 고독한 욥에게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11절을 보면 그 친구들은 욥의 집에서 만나기 위해 서로 약속을 해야 할 만큼 모이기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모인 것입니다. 온 몸에 피부병이 생긴 욥의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그가 욥인지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해 슬피 울었고, 칠 일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13절을 보면 친구들은 욥의 상태를 보고 할 말을 잃어서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점점 할 말이 사라진 것인지, 처음부터 말문이 막혀서 말을 할 수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친구들은 칠 일 동안 그저 욥의 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외로움, 고독은 가장 힘든 것이기에 함께 있어주는 것이 유일한 위로 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마저 욥을 고독하게 만들었지만 친구들은 욥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친구들도 점점 욥의 아내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욥의 고통을 그저 지켜보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4장부터 친구들은 욥에게 뭔가 해결책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충고, 조언은 욥을 더욱 괴롭게 했습니다. 욥은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도 자신이 소유한 신앙,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에 공감을 얻지 못하고 혼자가 되었고,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더욱 외롭게 고립되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없어도 아무 문제없고 우리끼리 행복할 수 있다는 듯이 속이려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끔찍한 일을 당할 때 내가 즐거워했던 이 세상을 외딴 곳, 낯선 곳으로 느끼게 됩니다. 고난은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던 세상이 사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고난은 그것을 당한 자만 아는 세계로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으로 우리가 세상의 아무도 의지할 수 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런 기회마저도 회피하려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고통을 감소시켜줄 울타리를 만들 수 있고, 약으로 통증을 잠재우고, 자기 곁에 사람을 머무르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는 고통당하는 자와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당하는 자를 맡기고 자신의 일상과 기쁨을 지킬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일반은총의 그런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람이 막을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고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계속 보내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고난을 반드시 만납니다. 성도라면 더더욱 그런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일깨우십니다.

 

    물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어느 정도 쓸모가 있습니다. 세상은 고난당하는 자에게 동정을 보여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고난당하는 자의 어둠과 슬픔에 결국 피로감을 느낍니다. 도와주려는 자들은 자신도 괴로워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 받고 있는 당사자가 자기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겪게 될 고통까지도 염려해야 할 만큼 이 세상은 고통에 대해 무력합니다. 또 위로하겠다고,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어설픈 격려와 해결책이라고 내놓는 조언은 더 큰 괴로움과 외로움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욥에게 일어난 것처럼 고난은 외로움을 가져옵니다.

 

    고난이 두려운 것은 그 자체의 통증이나 일상이 깨지는 좌절감도 만만치 않지만 그것을 아무도 공감해줄 수 없는 외로움, 고립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자신과 동일한 질병이나 고통을 이미 겪은 사람, 겪고 있는 사람에게서 큰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고독 속에서 나를 인정해주고 필요로 했던 세상, 나를 환영해주었던 이 세상이 어느 순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이 나의 고난에 대해 말씀해주시길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고난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함께 해주시길, 공감해주시길 바라게 됩니다.

 

    그 때 성도는 하나님이 완전한 위로가 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결코 침묵하시지 않고 계셨고, 이미 나의 고난과 외로움을 함께 지셨고 해결하셨음을 십자가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전혀 고통을 받으실 이유가 없지만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의 고통에 참여하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고통 속에 오셔서 함께 고난당하시고, 공감하시고, 해결하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순간부터 극한 고독 속에서 사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들 가운데서 사시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를 앞두고 감람산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은 옆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이 인간 중 누구도 함께하지 못한 고독한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단절되는 완전한 고독을 겪으셨습니다. 우리의 괴로움과 고독을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겪으셨고, 잘 아신다는 것, 나를 아신다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 믿음을 지킨 자의 결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은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성도는 배부름보다 고난과 외로움을 통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풍성히 만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멀리서 팔짱끼고 처다만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피조물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다른 헛된 종교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실, 피조물을 위해 고통을 겪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알고 믿는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배부름과 만족을 통해서도 자신이 사랑이심을 알게 하시지만, 고난을 통해서도 자신이 사랑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초한 고난, 우리의 타락으로 인한 고난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자신을 반역할 줄 아시면서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역자인 우리를 위해 몸소 이 땅에 오셔서 고난 겪을 것을 계획하시고 세상을 시작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난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을 알라고 우리 인생에 안락함 뿐 아니라 괴로움과 고독도 때로 안겨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 속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이 아름다운 결말을 보장하신다는 것을 소망하고 믿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