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5:1-2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원망하듯 토로한 것이 거슬렸습니다. 이제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각각 조언을 하고 욥이 일일이 대답을 하는 일이 세 번 반복됩니다. 그 대화는 두 번, 세 번 반복되면서 친구들은 점점 지치고, 논리도 무질서해지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3번째 대화 주기에서 빌닷의 말은 몇 마디에 불과하고, 소발은 아예 말이 없습니다. 이 내용이 4장부터 27장 까지 계속되는데, 우리는 각 친구들의 조언을 각 개인별로 묶어서 세 번에 다루고 욥의 대답을 따로 묶어서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등장하는 엘리바스는 세 친구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온화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권면은 매우 친절하게 시작됩니다.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핵심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원칙입니다. 4장 7-8절에서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라는 그가 말한 내용에 그 주장이 잘 나타납니다. 엘리바스는 이 세상이 도덕적인 세상임을 말합니다.
그런 엘리바스의 주장은 그만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욥의 가치관이기도 했습니다. 4장 1-4절의 내용이 그것을 말합니다. “너도 전에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힘없는 자들의 두 팔을 굳세게 붙들어 주기도 했으며, 쓰러지는 이들을 격려하여 일어나게도 하고, 힘이 빠진 이들의 무릎을 굳게 붙들어 주기도 했다. 이제 이 일을 정작 네가 당하니까 너는 짜증스러워하고, 이 일이 정작 네게 닥치니까 낙담하는구나!” 엘리바스가 상기시켜 준 인과응보의 세계관에 따라 욥은 하나님을 경외했었습니다. 욥은 화를 면하고, 복을 받기 위해 경건하고 흠 없이 살았고, 그 기준대로 사람들을 권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이 그렇게 경건하게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았음을 1장에서 확인했습니다. 욥은 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때문에 당황하고 절망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그동안 믿어왔던 원리를 계속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의 말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욥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주장은 일단 옳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선한 일에 복 주시고, 악은 징계를 받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고, 도덕적인 율법 아래에서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지만 그러나 도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역시 일반은총 아래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적용받는 도덕법, 자연법, 과학적 원칙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일을 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면 고통을 겪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그 인과응보의 원칙이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악한 일을 해도 뻔뻔하게 잘 사는 악인들이 있고, 아무 잘못이 없는데 끔찍한 사고를 당하거나 괴로움을 겪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엘리바스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엘리바스를 비롯한 욥의 친구들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보상과 처벌이 즉각적이기만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악한 자들은 모두 벌을 받아야 합니다. 또 선한 행위를 한 자들은 오랜 인내 없이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냥 두시는가?’하고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일이 일어납니다.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들이 편안한 삶을 사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공의로운 결과가 종말의 심판 때 가야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내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듯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도록 하나님이 잠시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마13장). 그래서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나의 고난에 무조건 자책할 수 없습니다. 또 고난당하는 상대에게 무조건 회개하라고 요청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내놓은 해결책은 욥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장에 가면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이 ‘너의 죄를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하냐 회개하라’라고 말하면서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그는 욥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회유합니다.
물론 엘리바스가 말한 인과응보의 원리가 일면 옳은 주장이듯, 고난 속에서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서 많은 부분 회개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욥처럼 하나님께 완전한 자라고 칭찬 받는 자가 아니고,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의 상당수는 우리의 실수와 책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인 우리는 고통 속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점검하고 회개합니다. 그것으로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에게는 회개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의 고난은 회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는 엘리바스의 조언은 욥에게 위로도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5:22-26절을 보면 엘리바스는 욥이 회개하고 경건한 모습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다시 주실 복들을 열거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탄이 하나님께 고소했던 내용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으려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주어질 보상 때문이 아닙니까?’라고 고소했던 내용입니다. 사탄이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선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문제제기를 하자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고 만족하고 경외할 수 있다는 것을 욥을 통해 보이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논리는 사탄이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욥이 복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네가 죄를 멀리하면 다시 복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너에게 유익할 것이다. 회개해라.’ 엘리바스의 그런 논리는 사탄이 천상에서 하나님께 제기한 이유가 맞는 것으로 결론이 끝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 해결과 하나님이 주실 복 때문에 인간이 신앙적인 것이라고 고소한 사탄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엘리바스의 논리에 굴복해서 신앙생활 하게 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바로 기복주의적인 번영신학입니다. 물론 앞에서 설명한대로 일반은총, 도덕적 인과관계 아래 사는 우리는 착하고 성실한 삶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상당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옵니다. 그러나 기복주의는 우리가 이 땅에서도 복 받고 천국에서도 복 받는 욕망에 집착하게 해서 하나님 자신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게 합니다. 번영신학이 심어주는 것은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게 살고, 교회에 헌신하고, 헌금을 잘 내고, 죄 지은 것이 있을 때 마다 신속하게 회개해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이 우리에게 오는 데에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문제 해결을 못 받거나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믿음이 없거나,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받게 됩니다.
우리 역시 꼭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나름 하나님께 좀 더 마음을 쏟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본능적으로 보상을 기대하곤 합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습관적인 죄를 끊어보려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읽습니다. 그러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의문과 반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도전, 경건한 삶을 그만두고 싶은 절망이 생깁니다. 나의 노력에 대해 잘 모르실 만큼 하나님은 무능하시거나, 공정한 분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하나님이 보상을 주시고, 반응하셔야만 믿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기계적인 신앙, 자판기 신앙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혹 하나님께서 권선징악이라는 인과관계가 완벽하게 실행되는 세상으로 창조하셨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우주를 비롯한 피조세계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우주와 지구 환경은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큼은 기계적인 원리, 행위에 따라 즉시 결과를 얻는 도덕법칙만으로 상대하시지 않고, 자신과 인격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모두가 타락했지만 영원한 형벌에 당장 던져 넣지 않으시고, 죄를 지어도 가인처럼 보호를 받게 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선하게 살아도 때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고난을 겪게도 하십니다, 즉 악인들에게 어울리지 않은 부당한 은혜와 경건한 자들에게 어울리지 않은 부당한 고통이 당분간 공존하게 하셨습니다. 인과응보 원칙대로 기계적으로 칼 같이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오해하고 원망할 위험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거리를, 여지를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각보다 죄를 무섭게 다루시지 않는다거나, 잘한 일에 보상을 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여길 여지를 두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자발적이고 성숙한 판단을 위해 무관심함을 보일 때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일정기간 역사 속에서 인과응보에 무관심하신 것처럼 일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해를 받으실 수 있고 희생을 감수하시는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는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기계적 원칙 외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최종심판 때에 인과응보에 따라 마무리를 하실 것입니다. 자격이 안 되는 부당한 은혜를 누리면서도 깨닫지 못한 악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피한 줄 알았던 혹독한 결과를 겪게 됩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죄 중에 주어진 은혜를 다 낭비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부당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경건한 성도들은 값없이 받는 은혜를 가치 있게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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