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욥기강해 (3) 욥기 3:1-26

따뜻한 진리 2021. 5. 16. 21:51

욥기 3:1-2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금까지의 욥기 내용은 욥의 외적인 고통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의 마음 속 내면에서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욥은 자기에게 닥친 고난 때문에 너무나 지쳤고 외로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욥은 여기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면서 저주한 것도 아닙니다. 욥은 단지 자신의 고통 자체, 자신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고 생명이 있다는 것을 원망스러워 합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고통을 주신 분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최종적으로 화살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욥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생일은 기쁜 날이고 모두가 매년 기억하고 축하해주는 날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생일이 시간 속에서 사라지길 바랍니다. 욥은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낳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나의 부모가 서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로 사랑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나를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내가 유산되었더라면, 출산 중에 내가 죽었더라면’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렇게 욥은 차라리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죽었다면 지금의 고통을 겪지 않고 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욥은 누구나 무사히 지나쳐가길 바라는 두려운 고비들이 자기 인생 중에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욥은 죽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자신을 비켜나간 것을 불행으로 여겼습니다.

 

   욥은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유일한 소망은 죽음을 통해 쉬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죽음을 주셔서 고통이 사라지길 바란 것입니다. 욥이 죽음을 소망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 자신의 삶이 마치기를 바란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명이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그 생명이 어떻게든지 오래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반대로 죽음은 악한 것, 복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준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은 반대로 자기 생명이 끝나기를, 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무엇이 인생의 복입니까? 물론 생명, 건강함, 평안함, 안락함, 배부름이 복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을 다 누릴 수 있는 조건과 환경 속에 있어도 그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것이 다 있어도 극심한 몸의 통증과 마음의 원한과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괴로움으로 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밤이 너무 괴로워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합니다.

 

   극한 고난은 우리가 우리의 현재 상태에 따라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을 반성하게 합니다. 우리가 한 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이제는 주셨으면 하는 것이 될 수 있고, 한 때 남들을 보고 부러웠던 것이 나중에는 나에게 안 주시길 다행이라고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일들에 대해 현재의 관점, 나의 상태를 기준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가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항상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죄의 삯, 대가가 사망, 죽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영적인 사망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육체적 사망까지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죽고 다시 사는, 거듭난 자에게 죽음은 소망이 됩니다. 성도가 자신의 남아 있는 죄성, 고통을 주는 타락한 이 세상과 이별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 자에게 죽음은 두렵고 악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열매를 바라며 썩어지는, 죽는 한 알의 밀알처럼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소망을 줍니다. 인생 동안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순종하고 충성한 후 누리게 될 안식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옵니다. 욥은 그런 쉴 수 있는 죽음을 바란 것입니다. 욥이 자살을 원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기에 욥은 하나님께서 그 죽음을 일찍 주시면 이런 고난을 겪지 않을 텐데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비참함을 토로한 것입니다.

 

   욥의 괴로운 탄식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볼 인물이 있는데 그는 욥과 거의 동일한 탄식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20장을 보면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불타는 소명의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지만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핍박과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욥이 했던 자기 생명에 대한 저주를 동일하게 말합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좋을 뻔하였나니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욥의 고난은 사탄의 고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이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천상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권에 순복했습니다. 인내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자기 잘못이 아닌데 겪는 소극적 고난을 겪었지만,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 극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소극적이든지, 적극적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충성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죽음은 처절한 소망이 됩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의 이유 없는 고난, 자기 책임이 아닌 고난과 예레미야의 불붙은 소명, 헌신에 의한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욥과 예레미야가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실 쉼을 바란 것에 초점을 둡시다.

 

   불신자들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계시지 않은 하나님, 나쁜 하나님으로 단정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을 주께 맡기거나,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안식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이 자기 것이니 스스로 결정하려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 하나님을 찾지도 의존하지도 않는 자들도 결국 지옥에서 뒤늦게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주시길 바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 때문에 제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게 될, 쉼을 가져오는 죽음이 그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참된 안식을 이 땅에서 바라는 자는 그것을 얻을 것이지만, 지옥에서 뒤늦게 찾는 자는 고통스런 생명을 영원히 갖습니다.

 

   성도는 여러 비참함과 까무러칠 고통 속에서 욥이나 예레미야처럼 죽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쏟아내는 참담한 토로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가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원망 섞인 간청을 하는 것을 괘씸하다고, 버릇없다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보다 어리석고, 유한한 우리에게 비난 받을 것을 감수하십니다. 엄마 아빠가 토라진 어린 자녀에게 자주 미움을 받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임을 하나님은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매달립시다. 욥이나 예레미야나 엘리야의 심정처럼 ‘저를 차라리 죽여주세요.’하는 고통이 있을 때라도 주님의 손에 우리를 맡기고 인내합시다. 다행인 것은 우리의 모든 고통에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죽음이라는 끝을 주셨습니다. 범죄로 인한 고난에 한계를 두셨습니다. 욥은 그 사실을 분명 믿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원한 죽음 그 이후에도 자신의 고난이 끝나지 않는다면 욥은 죽음에 소망을 둘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바람처럼 우리의 죽음이 평안이 되고, 쉼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 덕분입니다. 결국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