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7:1-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세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들을 먼저 살펴보았고, 오늘부터는 친구들의 주장에 대한 욥의 대답을 살필 것인데, 먼저 6장과 7장의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욥기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의롭게 여기신 성도에게 고난이 생긴 것을 보여주고, 그 고난 앞에서 어떤 해결책을 얻어야 하는지를 안내합니다. 그 해결책은 고난 자체를 이겨내는 것, 고난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하나님 자체를 신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철학이나 종교가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위로가 되셔야 함을 말합니다.
먼저 6장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원통한 마음과 고난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본다면 바닷가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기에 나의 말이 거칠 수밖에 없다, 전능하신 분이 나의 몸을 과녁으로 여기셔서 독화살을 쏘시니 그 화살이 내 몸에 박혀 이곳저곳이 뚫리고, 나의 영혼은 그 독을 마신다. 자네들이 내게 하는 말들은 마치 체한 자에게 먹으라고 주는 음식과 같아서 어떤 입맛도 당기지 않고 유익도 없다. 너희들은 물이 흐르다가도 금새 말라버리는 사막의 개울처럼 변덕스럽게 이익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구나. 그래서 물을 찾는 자들에게 허탈감을 주듯 자네들은 내게 실망을 안겨준다. 내가 언제 자네들에게 나의 원수를 무찔러 달라고 했나? 재산을 나눠달라고 했나? 나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나?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절망 속에서 함께 해주고 위로해줄 친구인데, 자네들은 고아를 노예로 팔아넘기듯 친구도 팔아넘길 자들이다.
욥은 친구들의 주장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지 못하는 역겨운 음식 같고 자신들의 자존심과 안전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욥에 대한 태도가 돌연 바뀌었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30절에서 욥은 ‘내 혀에 불의한 것이 붙어 있는 줄 아냐 내 혀가 독한 쓴 맛도 못 느끼는 줄 아냐!’라면서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있지만 친구들의 잘못된 말을 분별할 수 있다고 말 합니다. 그만큼 친구들의 말은 욥에게 고통만 주었습니다.
욥이 친구들의 교훈을 역겨운 음식에 비유하면서, 자기가 쓴맛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인 줄 아냐고 말한 것과 유사한 표현을 성경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시편 69편 20-21절을 보면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이 시편과 유사한 욥의 표현에 등장하는 음식은 부당하게 고난당하는 사람이 한탄과 원망마저도 못하도록 입을 다물게 만들고, 조롱하려는 의도로 제공된 거짓된 음식입니다. 그런데 그 것은 어떤 한 사람에로 집중됩니다. 그 사람은 마태복음 27장에서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신’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6장에서는 욥이 친구들에 대한 실망을 말했다면 7장에서는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을 쏟아냅니다. 욥은 자신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노예와 같아서 일을 마치는 저녁을 기다렸지만, 밤에도 쉬지 못하고 육신은 점점 썩고 무너져 내려 벌레에 의해 먹히는 시체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시간은 천을 짜는 베틀의 북처럼 너무나 빠르고 생명은 구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욥은 소망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이 분하고 원망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고 말하는데, 바다는 고대 근동에서 혼돈과 무질서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다에는 무찔러야 할 괴물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 보시냐고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에서 지키신다는 것은 보호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시하고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욥은 하나님은 왜 바다 괴물을 대하듯이 나를 적대시하고 압박하시냐고 항변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보시고, 둘러싸고 공격하시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원망스러워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과녁처럼 여기시고 고통의 화살을 쏘신다고, 바다괴물처럼 적대시한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시는 고통이 너무나 치우쳐있고, 부당하다면서 자신을 그냥 놔두시라는 말을 합니다. 17절에서 욥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이 말은 시편 8편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는 고백을 욥이 뒤집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고, 사명을 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에 감사를 표현했는데 욥은 그것을 패러디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 없이 완전하시고, 다른 피조물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거룩한 분이시고,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신데 왜 지극히 하찮은 인간을 지켜보시고, 죄를 찾아내시고, 고통을 주시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저 같은 자가 혹시 죄가 있어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실 수 있고,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어찌해서 적을 치듯 하시냐’고 묻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욥은 21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이 말은 8절의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라는 말을 반복한 것인데, 이것은 ‘인간은 어차피 죽는데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셔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저를 계속 이런 식으로 다루신다면 저는 죽고 사라집니다.’라는 말로 제발 자신을 놓아달라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재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탄식을 듣고 어떤 것 하나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그런 탄식과 질문들에 답하셨습니다. 욥과 친구들의 긴 대화 속에서, 비참한 고난 속에서 침묵하시던 하나님은 욥을 만나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 선명한 답을 주시지는 않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욥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욥이 친구들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먹을 수 없는 힘든 음식으로 비유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갖 조롱과 쓴 포도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참된 음식과 음료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 자신에게 임한 고통이 너무 부당하다는 욥의 탄원에 대해 하나님은 욥보다 더 부당하게 자기 죄가 아닌데 고난당하고 죽임 당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대답하셨습니다. 또 욥이 저를 이렇게 다루시면 저는 죽고 사라질 것이라고 절규한 것에 대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답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설 것이기에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이 부당하고 이해할 수 없어도 결국 부활한 몸을 입고 하나님의 설명을 듣게 될 것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욥의 울음과 탄식과 비통함은 사람이 듣지 못한 예수님의 내면의 고통을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하신 내용들을 더 잘 이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욥처럼 우리 인생과 고통에 대해 불만이 생기고, 의문이 들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위로를 줍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을 겪은 욥, 그리고 그보다 더 부당한 고난을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강해 (7) 욥기 11, 20장 (0) | 2021.06.13 |
---|---|
욥기강해 (6) 욥기 8, 18, 25장 (0) | 2021.06.06 |
욥기강해 (4) 욥기 4-5장 (0) | 2021.05.24 |
욥기강해 (3) 욥기 3:1-26 (0) | 2021.05.16 |
욥기강해 (2) 욥기 2:7-13 (0) | 2021.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