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8:39~41:3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에 다룬 38장 전반부에서 하나님은 우주, 하늘, 바다, 기상현상들을 가지고 질문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을 신뢰하라고 욥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동물의 세계로 욥을 데리고 오셔서 질문하십니다. ‘욥 네가 세상의 사자와 까마귀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느냐? 사슴이 낳은 새끼가 들판에서 자라고 어미를 떠나 혼자 살 수 있도록, 또 들나귀들이 황량한 들판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환경을 만들 수 있느냐? 또 들소를 온순한 가축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 빠르게 달리는 타조를 생각해봐라. 타조가 다른 새들과 달리 자기 알을 땅 속에 낳고 방치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욕할 수 있느냐? 말이 강한 힘과 용맹함을 가졌는데도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또 전쟁터의 두려운 소리들을 듣고도 주저하지 않고 용맹하게 뛰는데 그런 동물을 네가 만들어낼 수 있느냐, 독수리가 자기 둥지를 만드는 것과 매가 아찔한 낭떠러지에 사는 것은 네가 명령한 것이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 세계의 생명체들 중에는 탁월한 본능들을 가진 것들도 있지만 저 동물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염려될만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동물을 포식자들로부터 잡아 먹히는 것이 불쌍하다고 해서 우리가 만든 공간에 데려다 놓고, 음식을 구하는 고생이 필요 없도록 먹을 것도 충분히 주면서 돌봐주면 그것들이 행복할까요? 그러면 모든 동물들이 덜 고생하고 살기 좋은 생태계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자연세계, 생태계는 하나님의 지혜가 충분하게 담겨진 훌륭한 시스템입니다.
또 어떤 생물은 활동적이지만 다른 생물은 게으르게 보입니다. 어떤 동물은 강하고, 어떤 동물을 약합니다. 우리가 타조를 어리석다고 욕할 수 없고,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맹수들을 나쁘다고 혼낼 수 없고,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다고 해서 무책임하고 간사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동물들은 각자 피조세계 내에서 자신의 역할들을 하면서 자연 전체가 지속되도록 봉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런 동식물들의 상호작용, 복잡한 조화를 과학적으로 알아내고는 있지만 극히 일부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인간은 생물들을 통제하고, 돌봐주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 생물들을 돌보고 계셨습니다. 인간이 과학기술을 가지고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자연 세계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더 큰 재앙으로 돌아오는 일이 계속됩니다. 욥은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동물의 세계에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욥은 이런 인간들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질문을 받은 것입니다. ‘네가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느냐! 피조세계와 동물을 더 잘 돌볼 수 있느냐?’
40장으로 가면 하나님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말씀하십니다. 이 생물들은 도저히 인간이 통제하거나 가까이 할 수 없는 괴물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생물들을 자신만이 통제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생물을 하마와 악어라고 해석해왔고, 개역한글판에도 하마와 악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지구상의 어떤 생물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다른 해석은 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사탄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탄을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짐승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짐승, 용, 뱀, 바다괴물의 이미지를 사용해 사탄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욥기 처음에 등장한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고소하고, 욥에게 고난을 주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탄을 통제하신다는 것을 암시하시려고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욥에게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귀엽고 약해 보이는 토끼를 강하고 무서운 맹수가 잡아먹는 것에 대해 인간이 결코 악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자연 질서 속에 존재하는 고통을 필요 없는 것, 없애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조 세계가 작동하는데 발생하는 고통과 죽음을 대신할 다른 방법을 인간이 생각해 낼 수도 만들어 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육식을 그만두고 채식만 한다 해도, 동식물들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먹고 먹히는 일이 계속됩니다.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않는다고 다른 동물들까지 육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의 고통에도 그런 원리가 있습니다. 물론 자연 질서 속 약육강식에서 일어나는 고통에는 죄나 책임 같은 것이 없고 인간 세계의 고통은 죄와 도덕적 책임이 연관되어 있으니 동일하다고 볼 수 없지만 자연 속 동식물들의 생존에나 인간들의 삶에나 고통, 고난이 분명한 역할을 하고 있고, 그것을 대체하거나 없앨 수 있는 다른 지혜나 능력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생태계가 죽음, 고통에 의해 생명이 전달되는 것처럼, 인간 세계 역시 고난, 죽음에 의해 생명이 전달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피조세계는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질서를 통해 자신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 속 동물들의 다양한 특성들을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존재인 사탄의 존재와 활동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세상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일어나는 것, 악하고 약삭빠른 자들이 잘되는 불의한 일이 지속되는 것보다 그런 일들을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불만, 불신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들을 당장 하나도 남김없이 지옥에 던져버리는 것이 옳은 일, 정의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그러한 우리의 판단을 들이밀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정의감대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악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지만 그 심판의 시기를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때에 실행하시고 늦추기도 하시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더 뛰어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만의 권한이라는 것을 알리십니다. 사탄과 고난과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선과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고난과 비참함과 악인들이 활개 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완벽하다는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역경과 불의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이 더욱 견고하게 된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 위기가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주인공 두 남녀 사이에 신뢰와 사랑이 생겨나는 내용이 자주 나타납니다. 인생의 어떤 순간보다 극적인 순간,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에 두 사람이 함께 하고, 서로를 구하기도 하고, 결국 안도의 순간을 함께 맞이하게 될 때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우리는 예상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과 고통, 불의가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멋진 상대 주인공보다 찬란하고, 아름답고, 공의로운 결말을 맺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풀 한포기, 작은 새 한 마리라도 각자의 특별함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맛보고 고생도 하다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에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가 깃들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 않습니까?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보라, 하물며 너희들은 어떻게 여기시겠느냐!’ 우리는 지금은 잘 알지 못하고 오해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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