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1-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이 주신 질문들을 통해 욥은 사람의 통제 밖에 있는 자연 현상들과 동물들의 신비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을 수 없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면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그동안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판단하려 했고, 원망했던 죄를 회개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욥처럼 진실하고 정직하지는 못했다고 꾸짖으십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위대하고 공의로운 분이시지만, 실패하고 고통스러울 때 달려가 투정하고 안길 수 있는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친구들에게 욥의 중보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욥이 제사장이 되어 친구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처리하고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틀리고 자신들이 옳은 줄 알았는데, 자신들의 죄를 욥에게 의지해서 용서받아야 했으니 충격을 받고 자존심도 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수양 일곱 마리, 총 14마리의 동물을 태우는 뜨거운 불과 숨 막힐 듯 자욱한 연기 속에서 자신들의 죄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친구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의 고통을 사라지게 해주셨습니다. 욥은 다시 건강해졌고, 자녀들을 낳았고, 부유해졌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장면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결말은 모든 성도들이 고난을 겪은 후에 이 땅에서 그런 극적인 회복과 풍성함을 얻을 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욥이 세상적인 부유함을 얻은 것을 우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하고, 욥이 이 땅에서 누린 풍성함보다 더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나라에서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마무리하면서 욥이 가리킨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고소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욥에게 고난을 가하도록 허용하신 것 같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욥이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한 것처럼 예수님은 아무 잘못 없이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욥은 부당하게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욥기 마지막 장면은 부당한 고난을 당한 자가 어떻게 은혜의 통로가 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친구들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도록 욥이 중보자, 제사장 역할을 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당한 책임이 욥 자신에게 있다고 비난했지만, 마지막에 결국 그들은 욥 덕분에 죄를 용서받습니다. 부당한 고난을 당한 욥이 친구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었듯, 부당한 고난을 당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원리인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내가 고통당하고, 내가 잘 하지 않았는데 내가 구원받는 원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를 저질렀는데 많은 인류가 죄인이 되어 고통을 당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순종하여 얻으신 공로로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이 구원받는 이 원리를 부당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책임과 공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인 결과를 얻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한만큼 내가 칭찬과 보상을 받고, 내가 잘못한 만큼 내가 혼나고 벌을 받는 것이 공정합니다. 그러나 내 잘못이 아닌 고통을 겪으면 원통한 것이고, 내 공로가 아닌 은혜를 받아야 한다면 자존심을 해치거나 방종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원리를 우리의 타락과 구원의 핵심 원리 중 하나로 삼으셨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과 한 사람의 순종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셨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그런 원리를 사용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원리에 의해 고통당했고, 결국 그런 원리에 따라 친구들이 하나님께 용서 받도록 중보자가 된 것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개별주의, 개인주의적인 보응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각자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가 주어진 가운데 자기 행위에 따라 결과를 당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세상의 과학 법칙과 윤리적 결과들이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일어나도록 운영하십니다. 지혜롭고 착한 일 한 사람이 잘 되고, 어리석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이 나쁜 결과를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의존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데 죄인으로 태어나고, 내가 선택한 적이 없는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 영향을 받고, 또 내가 이루지 않은 공로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그것이 부당한 것 같지만 우리는 사랑에 그런 속성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내 잘못이 아니라도 사랑하는 자의 문제를 내가 지고 고난당합니다. 또 내가 이룬 공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져가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고 기꺼이 줍니다. 또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 죄를 즐거워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행동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범죄를 멀리하게 되고, 성실하게 살게 됩니다. 사랑은 개인주의, 개별주의를 뛰어넘어 나의 잘못이 아닌 고난을 감수하게 만들고, 나의 공로를 상대방이 누리는 것을 기뻐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있을 때 그렇게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고 고통을 감수하고 내 공로를 나누다가도 어느새 사랑이 식으면 누구 잘못인지 따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을 가르치시고, 우리도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자신은 아무 잘못 없으시나 자신이 지은 피조물 때문에 고난당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창조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당하게 보일만큼 자신의 은혜를 자격 없는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이 들려오기 까지 수많은 주의 종들이, 전도자들이 자기 잘못이 아닌데 부당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이 복음을 지키고 전달하기 위해 부당한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부당한 고난을 감수하셨듯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한 고난을 감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 공로가 아닌 은혜를 받아 누리니 내 잘못이 아닌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며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나 중심의 개인주의, 이기주의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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