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14) 누가복음 9:18-36

따뜻한 진리 2021. 10. 31. 23:39

누가복음 9:18-3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 우리는 제자들이 자신을 닮고 따르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주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제자들은 복음전도를 다녀오고, 오천 명의 사람들도 먹였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어떤 이들은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앞의 8절에서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헤롯왕의 죄책감을 건드렸고, 예수님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다루는 마태복음 16장에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가 말한 예수님에 대한 그 표현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신약언어인 그리스어인데 이것은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메시아’를 자신들의 현실적 필요와 연관해서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치고, 다시 부흥을 가져올 다윗과 같은 정치적 리더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대답이 한편으로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더 강화시키는 것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알리지 말라고 막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승리와 번영을 가져올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을 것을 바로 이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악한 범죄자들을 죽이는 잔혹하고 수치스런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제자들을 포함한 누구든지 거부반응을 보이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26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 사이에서 영광스럽게 계실 것을 묘사하시면서 자신이 그렇게 죽는다고 해서 결코 부끄럽고 허망한 결말을 가져오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 실패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승리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맛보게 하시려고 변화산 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변화산 사건을 제자들 중 몇이 경험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구약의 대표적인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31절의 내용,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죽으실 것에 대해 말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졸다가 그런 중요한 말은 듣지 못하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것을 본 후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초막을 짓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하면서 자신들이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을 계속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하늘에서는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음성은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씻음을 의미하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음성과 유사합니다. 이는 죄인 취급당하고,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 예수님의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사랑받는 아들로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임을 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을 하시면서 자신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받고 죽임 당하고 부활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셨고, 또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내셔서 자신이 죽어야 할 것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들려주셨는데도 알아채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늘의 음성까지 들려온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적들로 병든 자들이 치유되고, 귀신들린 자가 자유롭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런 능력을 자신들에게도 주시는 놀라운 권위와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 자신들에게까지 그런 능력이 베풀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자신들이 어벤져스 같은 멋진 일들을 할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22절에서 자신이 고난 받고 죽임당하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24절에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님처럼 고난 받고, 죽임당할 것을 예상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은 예수님처럼 이적을 행하고 복음 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사람들에겐 사람들을 놀라게 할 능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참고 인내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능력도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런 능력이 더 핵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일 중에서 가장 주된 일은 어떤 이적을 행하는 것보다 죄인을 깨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처럼 고통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내가 전하는 복음을 믿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보다 사람들의 냉소와 반대와 죄를 참고, 용서하고, 고난과 불이익 속에서도 인내하는 것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사람은 예수님처럼 고난당하는 것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신비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인해 생겨난 많은 인기와 환호를 만족스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과 무관하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약속하신대로 죄인들의 왕으로서,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로서 십자가라는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4-25)라고 말씀하신대로 나보다 높으신 분이 반대와 핍박과 죽임을 당하셨는데 그분을 따르고 섬기는 자가 더 잘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듯 주님을 따르는 자들도 예수님처럼 오해와 미움과 반대와 핍박과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예수님은 죽음과 함께 부활을 말씀하셨고, 예수님을 따라 목숨을 잃는 자가 생명을 얻을 것을 약속하셨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처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