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가복음 강해 (15) 누가복음 9:37-56

따뜻한 진리 2021. 11. 7. 20:04

누가복음 9:37-5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닮습니다. 제자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닮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고, 예수님처럼 이적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산에 오르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후 내려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예수님께 몰려들었고, 그중 한 사람은 자기 아들의 문제를 제자들이 해결해주지 못했다면서 예수님께 다시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기 전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오.'라고 꾸짖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자신들의 육신적 문제 해결에만 매달리는 군중을 가리키는 것인지, 귀신을 못 쫓은 제자들을 향한 것인지에 대해 해석이 갈리지만 제자들의 실패를 다루고 있는 문맥상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에 사람들이 놀라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라는 말씀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한계, 무지도 원인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성취되기까지 그들이 무지 가운데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의 이해와 공감과 도움과 참여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45절을 보면 예수님의 자기 죽음에 대한 예고가 숨긴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시는지에 대해 들어도 깨닫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꾸 말씀하신 이유 중 한 가지는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이고, 그 죽음을 그저 수동적으로 당하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죽음을 향해 가신 것임을 제자들이 나중에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오래전에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계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중요한 사건, 세상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사역에 대해 자꾸 말씀하셨지만 46절을 보면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 누가 더 높은지, 누가 예수님과 가까운 서열인지를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세워두시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어린아이가 어느 나라이든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존경받는, 높은 위치와는 거리가 먼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무시할만한 존재를 존중할 수 있는 낮고,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존경받고자 하는, 높아지고자 하는 욕구와 충돌하는 교훈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지만 제자들 그룹에 속하지 않은 누군가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그 사람에게 그런 능력을 행하지 못하게 금지시켰다고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오랜 기간 함께 하고 있는 자기들만 그런 능력을 행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들이 예수님께 대단한 인정을 받아서 그런 능력을 허락받은 것인 줄 생각한 것입니다. 특별한 소속감 같은 것을 가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배타적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실 때가 가까워진 것을 생각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기 때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동네를 거쳐서 가시려고 한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들어가신 사마리아의 한 마을은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심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우리가 누군지 알아?’라는 태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멋진 활약을 드디어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고 들떠 있었지만 예수님께 꾸짖음을 당하고 실패를 드러냈습니다. 벌써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했고, 인정받는 것과 권력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고, 특권의식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여전히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자꾸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자신들이 꿈꾸는 것이 물거품이 될까 봐 예수님께 물어보는 것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을 제자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잘 알아보았기 때문이거나, 가르치시는 내용들에 대한 이해력이 좋아서, 처음부터 믿음이 탁월했거나, 머리가 좋거나 체력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또 그들이 놀라운 이적 행할 능력을 부여받은 것은 신비한 능력을 다룰 수 있는 엄청난 집중력을 터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거저, 조건 없이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로 거저 구원받았고, 자격 없이 제자들로 선택되었고, 쌓아온 실력 없이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아 사람들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제자들 다운 태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얻은 여러 유익을 세상적으로 과시하고,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자들이 여전히 인간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인간적인 이유로 신앙생활을 해왔는지를 때때로 확인하게 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대답과 고백이 얼마나 껍데기뿐이었는지, 자기만족에 근거한 종교생활이었는지 탄로 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회만 되면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자들임이 이 코로나를 통해 드러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갈수록 대단한 칭찬받을만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주님께서 이런 나인 줄 아시면서 처음부터 은혜로 구원하시고, 함께 하시는 그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뭔가를 오래 할수록, 인정받는 그룹에 속할수록 특권의식, 자랑스러움, 배타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탁월한 순종을 하고, 좋은 열매를 맺어도 특권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별하신 이유는 잘난 척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하나님을 나타내면서 섬기라고, 희생하고 죽으라고 부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심판 때에 우리를 세상 가운데 높이시고, 하나님 나라라는 상급을 주실지라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우쭐해질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좋은 것들이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점에서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비천하게 되신 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압니다.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예수님의 겸손이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도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겸손은 교양 있게,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춰야 할 태도 중 하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거저 주셨기에 주님에 대한 황송함, 감사함 때문에 당연히 드러나는 것이어야 하며, 가장 높으신 분을 항상 앞에 모시기에 드러나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 거이며, 이 세상이 나의 힘으로 변화될 수 없음을 알기에 주께서 드러나시고 일하시기를 바라는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겸손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