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창세기 강해 (42) 창세기 26:1-33

따뜻한 진리 2023. 2. 19. 21:37

창세기 26:1-3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에서 우리는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넘긴 사건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다시 그들의 아버지 이삭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삭에게 일어난 흉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 우물을 두고 다툰 일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일을 반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흉년을 두 번 겪었는데 그때 애굽과 그랄로 옮겨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두 번 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자기 살길을 꾀했습니다. 아들 이삭 역시 흉년이 일어나자 그랄 땅에 머무르다가 애굽으로 가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고 지시한 땅에 머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이삭에게 다시 확인시켜 주셨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했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와 달리 애굽으로 가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지만, 그랄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으로써 아버지가 행한 잘못을 반복합니다. 결국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인 것을 알게 되고 이삭은 부끄럽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셔서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이삭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찾아 개발한 우물을 막아버려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이삭은 종들을 시켜 새로운 샘 두 곳을 찾았지만 그랄의 목자들과 싸움이 일어나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우물의 이름은 에섹(다툼)과 싯나(대적)였습니다. 결국 다른 곳에서 우물을 찾아 파냈는데 거기서는 다툼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넓은 곳)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닫고 서로 피해를 주지 않기로 언약 맺기를 제안했습니다. 이삭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언약을 맺고 잔치를 했습니다. 그 후 이삭의 종들이 다른 우물을 또 찾아서 파내자 이삭은 세바라고 이름 지었고, 그 성읍이 브엘세바라고 불렀습니다. 이삭은 자신의 잘못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고, 복 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위험에서 건짐을 받고, 거짓말해도 넘어가게 되고, 부자가 되고, 좋은 우물을 많이 얻게 된 것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장자권을 두고 벌인 일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앞뒤의 내용을 연결해 주고, 그 내용들에서 일어난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나게 합니다. 본문 앞은 에서가 장자권을 넘긴 사건이고, 다음에 오는 내용은 야곱이 장자권을 가로채는 사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그 앞뒤의 이야기와 공유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굶주림이라는 요소입니다. 앞에서 에서가 사냥하러 갔다가 굶주림으로 정신을 못 차렸다면, 본문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을 피하고자 약속의 땅을 벗어날 뻔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속임수라는 요소입니다. 본문에서 아버지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면, 다음 이야기에서는 아들 야곱이 장자권을 얻으려고 자기가 형 에서인 것처럼 아버지를 속입니다. 이것은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자권을 함부로 여긴 아들이나, 속여서 인간적으로 장자권을 빼앗으려는 아들의 문제가 그 아버지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둘째로 본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이 아들 이삭에게도 이어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언약의 특권을 유지하고 전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많은 후손과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당사자인 사람들은 그 약속을 잘 지켜내기보다 위태롭게 만듭니다. 아버지 이삭과 아들인 에서와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물려받아 누리고, 영광을 얻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잘 담고 지켜야 하는 자신들의 삶을 훼손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땅으로 가려 했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닮은, 인간 사이의 중요한 언약 관계인 혼인을 속임수로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속임수라는 아브라함의 잘못이 이삭에게도 반복되었지만 동시에 그 아버지와 아들에게 동일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본문은 에서가 우습게 여긴 그 장자권은 그 아버지 이삭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부자가 되게 하신 특권이었다고 말합니다. 에서는 그 중요성을 몰랐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야곱이 장자권을 아버지에게서 얻으려고 꼼수를 썼지만 누가 장자가 될지는 아버지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이고 실제로 복이 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이 그토록 차지하고 싶었던 장자권,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중심 무대에 속할 수 있는 특권이 누구에게서 오는가, 그 특권이 어떻게 지켜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장자권은 아버지 이삭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자권을 지키는 것도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본문은 ‘언약 안에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앞뒤 장면에서 에서와 야곱의 문제가 잘 드러나게 합니다. 에서와 야곱 둘 다 이삭을 닮았고, 이삭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닮기보다 인간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야곱의 속임수는 아버지 이삭을 닮은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약속의 땅에 잘 머무르며 순종한 장점보다 속임수라는 잘못을 따라합니다. 아버지가 속였으니 나도 아버지와 형을 속여도 될 것이라는 자기 정당화를 했을 것입니다. 부모를 무시하고 거역하는 자녀들의 공통점이 그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상대가 잘한 점을 본받는 일에는 더디고, 단점을 핑계 삼아 자기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장자권을 갖게 될 것을 암시하셨지만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가면서까지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잘못을 사용하셔서 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내를 이용해서 거짓말을 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복을 주셨던 것처럼, 야곱이 속임수로 장자권을 가로챘지만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시고 언약 당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그에 따른 결과는 인생을 사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가를 치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는 과정에서도 아브라함의 잘못은 이삭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이삭의 잘못은 야곱에게 영향을 주어 가정의 불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부모 자녀 사이의 이런 문제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었던 아버지 이삭과 아들 야곱 사이에서만 일어난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겪는 문제입니다. 부모의 문제가 자녀에게 반복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의 단점, 결점을 인식합니다. 부모의 잘못 된 성향과 행동 중 어떤 것에 상처를 받거나 그것으로 고통을 겪게 되면 그 반작용으로 닮지 않으려는, 벗어나려는 노력들을 대부분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문제를 겉으로 극복하기도 하지만, 그 죄의 성향이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에게서 반복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부모의 문제 중 어떤 것은 그대로 닮았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모르며 살거나, 남을 괴롭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성향 역시 부모에게서 온 것입니다. 약삭빠르고, 자기 이익에 집착하며, 속이는 성향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에게서 뿐 아니라 아담에게서 온 죄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잘 아시면서 언약을 통해 한 집안을 선택하셔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을 완전한 사람으로 바꾸신 후 사용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도 사용하시는데, 그들의 상태를 그냥 두시면서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십니다. 또 성도들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변화되도록 성숙시키시지만 완전하고 흠이 없는 자로 바꾸신 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에서 은혜를 베풀며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모가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또 단점이 많은 부모일지라도 나를 세상에 있게 하시고, 구원하시기까지 부모를 통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의 문제 때문에 그들을 증오하거나, 또 잘못인 줄 알면서도 부모가 하니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은혜를 아는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인하고 싶지만 모두 자기 부모를 닮은 자녀들입니다. 이삭과 야곱처럼 부모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참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나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안다면 나를 닮게 한 내 부모에 대해서도 바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나의 원형인 부모를 다르게 대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많은 부분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야곱이 자초한 고통을 반복하지 않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