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에베소서 강해 12 에베소서 1:11-14

따뜻한 진리 2023. 11. 19. 19:43

에베소서 1:11-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왜 사는지 그 이유를 깨닫고, 존엄성을 회복하고, 참된 복을 누리는 길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단지 인생 속에 있는 괴로움과 비참한 것들을 해결해 주는 정도를 뛰어넘어 우리를 가장 영광스럽게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이유들을 겹겹이 계속 쌓아가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핀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들을 기억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여겨주시는 성도이기에 영광스럽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기 때문에 영광스럽고, 그런 복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세우신 계획에 우리를 포함시켜 주셔서 영광스럽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영원히 허락하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맛보게 해주시기에 영광스러운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아주시니 영광스러운 것이고, 속량 곧 죄사함을 베풀어 주시려고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러한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는 지혜와 총명으로 깨닫게 하시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자들, 그리고 죄인이었던 자들에게 이런 은혜들을 부어주시기에 영광입니다.

 

     바울은 본문 11절과 14절에서 그런 영광을 누리는 것을 기업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를 의미하는 기업과(대기업, 중소기업) 한자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업은 대대로 지속해서, 영원히 물려받는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영원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영광스런 복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누리는 하늘 유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기업은 단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복만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과 성도가 서로를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자 아버지로서 우리를 소유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권리를 요청할 수 있는 서로가 묶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소유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을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말하듯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내용들이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결속, 기업 안에서 약속됩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귀에는 좋게 들리기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정말 기쁘게 하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복이 정말 나의 것인가 와닿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믿고, 내가 죄인인 것도 알겠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구주이신 것도 믿어지지만 기업이라는 말해 담겨진 영광스러운 복이 정말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인지, 정말 있기는 한 것인지, 그것이 나에게 진짜 기쁨을 줄 것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께서 인치심이 되신다고, 그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주인이 자기 종이나 가축에 자기 것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보낸 편지 봉투 입구에 촛농을 떨어뜨리고 도장 자국을 남겨서 보내는 사람의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 인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기업이 보증이 되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것이구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나의 아버지이시구나’를 확신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런 복들이 진실로 구원받은 자에게 보장된 것임을 확신하도록 성령께서 증인이 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인격적으로 느끼며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또 아버지를 부르짖으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아무 감정 없이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것, 신뢰하신 것, 의지하신 것이 감정으로 드러났습니다. 성경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이라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단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의 어떤 점들을 우리도 닮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보면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대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가까이 계신 아버지로 여기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어떤 신비주의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믿음이 단순히 지성과 이해력으로 작동하는 수준을 넘어 마음속 정서에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진심이 없이, 마음이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바울이 찬양했던 하나님을 우리도 진심으로 찬양하는 기쁨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반하는 죄와 싸울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제자들에게 일하신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주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뜨겁게 사로잡히는 경험을 주십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과 실패와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을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성경에서 글로 보고, 말로 들었던 내용들을 생생하게 마음에 그려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자기 것으로, 자녀로 여기시는 아버지이심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신 것을 믿게 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나의 죄짓는 일들을 감히 계속할 수 없도록 양심의 각성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불붙는 마음을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죄를 즐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를 보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등진 채로 얼마나 인생을 낭비하며 복을 자기 발로 걷어차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깨달으며 후회하게 만드십니다. 탕자 비유 속 아버지 집을 떠난 둘째 아들과 같은 자가 나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 집을 떠나 세상의 쾌락과 방탕함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어리석은지를 보게 되고, 줄곧 아버지의 사랑을 누렸으면서도 불만을 품고 반항하고 뛰쳐나온 자신에 대해 뉘우치고,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신뢰하면서 집으로 돌아갈 의지와 용기가 생기는 것은 죄인이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그 사랑을 신뢰하고,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임을 신뢰하는 마음을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이 바로 14절에서 말하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의 일을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8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모든 사실들을 동원하여 생각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이끌리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아들을 믿도록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으시고, 아버지의 사랑에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우리의 정서를 어루만지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열심을 내도록 의지를 발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이러하신 성령이 우리를 인을 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