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1-3 (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눈을 밝혀 주시고, 베푸신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구한 이유는 앞으로 말하려는 내용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과 마음 상태로는 거부감을 일으킬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견고히 하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장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깨달아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가치를 알고 진정 은혜와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깊은 바닥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죄인이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하늘 기업의 영광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우리와 세상이 처해 있는 현실의 비참을 알아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영광스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던 우리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십니다. 구원은 온 우주와 한 영혼을 바꾸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간의 도움만 주시면 충분히 잘 할 수 있고, 약간의 문제만 해결 받으면 되는 희망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매우 절망적이고 참혹한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죗값을 치러야 하는 죄인을 자녀로 바꿔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큰 비참함과 큰 위험에서 건짐을 받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분별력이 없는 어린 아이는 자기 혼자 도로로 걸어나갔다가 달려오는 트럭에 받히기 직전 부모에 의해 구조되었어도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어도 자신이 얼마나 큰 비참함과 악함에서 구원받았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과 세상의 죄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깨달아 갈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계속 그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른다면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사악한 것임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처럼 되셔서 고난 당하신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의 손길이 미치기 전 우리가 이 악한 세상의 가치관과 유행과 사고방식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던 자들이었다고,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을 따르던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처음부터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해 무시하고 침묵합니다. 우리 시대는 과학적, 합리적이라는 명분 아래 죄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해체하고, 부수고 있습니다. 성경의 십계명이 분명히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기본 윤리들을 사람들이 허물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가치 체계를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신은 없다면서 무신론적인 기반 아래 종교를 허물어뜨리려 합니다. 많은 종교 중에서도 이상하게도 특별히 기독교를 공격합니다. 그들은 종교가 권력과 계급을 위해 만들어졌고,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죄의 규정들이 만들어졌고, 복종해야 할 당위성을 만들어내려고 권력자들이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나름 과학으로 무장한 무신론자들은 인간이 단지 유전자에 의해 지배되고 생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유전자가 자기를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본능, 자신을 복제해서 세상에 퍼뜨리기 위한 본능에 의해 모든 생물 현상, 인간의 사회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런 본성을 잘 이해하고 서로 협력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종교가 억압과 차별을 만들었기 때문에 종교는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신이 없으니 인생을 즐기라’고 버스에 광고를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깨우치고 교육하고, 관용과 인권과 평화에 대해 잘 가르치면, 기술발전으로 가난을 해결하면, 서로가 손잡고 협력하면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한 설명들을 듣기 싫다는 저항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갈등과 싸움은 다른 원인 때문이고 생태계로부터 배우면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 인간의 고통과 다툼과 갈등과 전쟁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아닌 인간들의 어떤 지혜도 죄를 무시하고 있고, 죄를 다루는 일에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죄에 대해 무시합니다. 그들이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해 반감을 갖고 반대한다 해도 그 자신의 죄성에 대해서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죄를 무시하면서도 그 자신은 죄를 짓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고 화를 내고, 비난도 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현대 과학, 또는 의학이 가진 한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의 죄로 괴로움을 당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질병까지 얻었지만 단지 수면제와 안정제로 증상만 해결하는데 그런 한계를 무신론자들이 죄 앞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죄를 저지르고, 죄의 고통을 입으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대해 단언하는 내용들이 성경이 진리임을 말합니다.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을 증거할 뿐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의 양심이 죄를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합니다. 로마서 2:14-15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인간이 부패했기 때문에 죄에 대해 소리 지르는 양심마저 죽이면서 죄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 죄를 판단하시는 하나님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경험하는 사실, 분명한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불행을 추상적으로 관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깨달음들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니라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살았었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토대로 주어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경이 시작부터 사람의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창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인간의 타락이 큰 부분입니다. 창세기는 아담, 가인, 그의 후손들, 노아의 시대까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인간의 타락과 그 죄의 확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의 결과로 닥친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기원에 대해, 그 죄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에 대해,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 해결책이 누구의 손에 달렸는지에 대해 성경은 처음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생겨난 여러 철학과 사상, 현대 국가를 주도하는 여러 이념들과 과학이 쓸모가 있고 유용한 부분이 있지만 죄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회피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말합니다. 그런 죄인을 우리 주님께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비현실, 비실재라고 말합니다. 또 죄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무엇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진정 사실이십니다. 하나님이 현실이십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입니다. 죄는 어떤 과학, 어떤 이념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현실적인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에덴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현실 속에서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진노하도록 만들고 있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계속 저지르고자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없다고 여기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해 회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성에 대해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심을 시인하고 믿는 것, 또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심을 믿는 것은 결코 별개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이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주신 사람들은 자신의 죄, 더러움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인간이 죄에 대해 무지하고 회피하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나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사람의 자기 죄에 대한 각성과 돌이킴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이 죄를 누구도 피하거나 다른 것으로 속일 수 없습니다.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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