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에베소서 강해 27 에베소서 2:8-10 (3)

따뜻한 진리 2024. 3. 3. 21:48

에베소서 2:8-10 (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내게 필요하니 믿겠다는 선택, 신념,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욕심과 착각 때문에 그런 믿음이 작동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믿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상대를 믿은 것이 올바른 일이었는지는 상대에게 달린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의 확실성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만한 분인지 관찰하고 살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주시고 하나님 자신을 믿도록 일하시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은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동시에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난다고, 열매를 생산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 듯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약 2:17) 이 말은 마치 믿음보다 사람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으나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한 것은 말로는 자기가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그저 지식적으로, 정신적으로 인정할 뿐 삶의 태도나 행동에는 변화가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말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귀신들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임을 믿습니다. 어쩌면 귀신들이 우리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고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의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거짓 믿음, 죽은 믿음의 문제를 비유로 잘 말씀해주셨습니다.(마 13:20-23) 그것은 바로 뿌려진 씨앗 비유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기쁨을 잠깐 드러내 보이지만 결국 어려움을 만나면 넘어지는 믿음을 가리키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세상 걱정과 유혹 때문에 믿음이 방해를 받는 것이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풍성한 믿음의 결실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 믿음은 오래 가지 않고 열매도 없지만 참 믿음은 죄와 싸우고, 끝까지 인내하고 열매를 내어 하나님이 심으신 것임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거짓된 믿음을 알고 계셨고, 지적해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러 곳을 다니실 때 방문한 그 지역 사람들에게 거할 곳과 음식을 제공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푸는 이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속을 알고 계셨고, 그들에게 도움을 부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8장 31절을 보면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노예라고, 진리이신 예수님 자신이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정 알고 믿었다면 예수님이 자기들에 대해 진단하시는 것도 받아들이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은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회개와 순종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분노와 폭력을 드러냈습니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사실을 많이 아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님이라는 분이 이 땅에 오셨다가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도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탄절을 기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한다고 해서 구원 얻는 믿음은 아닙니다.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면서 후회하는 사람들과 법정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는 범죄자들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나 구원에 대해 단순히 지적이고, 정신적인 동의를 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구원 얻는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복음을 자기를 위한 구원의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믿음은 동의와 고백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진정 하나님이 주신 믿음인가는 시간 속에서 회개와 인내와 변화된 삶과 행함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뜻이지, 아무 결단이나 수고나 헌신도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 8절에서 9절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9절을 보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10절 끝에서는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난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목적이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원래 계획대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자랑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게 하시려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 사람의 바른 행위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만족과 칭찬 받기 위해, 자기 영광을 위해 행했다면 이제는 이미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행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 행함으로 증명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단지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고 믿는 자는 그분을 닮으려 하고, 그분께 순종하려 하기 때문에 선한 행실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존경하기 때문에 닮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여러 사람들을 믿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병이 낫고 싶고, 건강해지고 싶다면 의사의 말을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실력 있는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믿습니다. 또 내가 모르는 분야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사나 전문가의 성품과 도덕성을 닮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전문가들이 중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그들의 됨됨이와 실제 삶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실력만 탁월하다면 그들이 주는 도움을 기꺼이 이용합니다. 그것은 그 대상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과 소망과 존경심 등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구원자, 문제 해결사 정도이신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백성을 위하는 가장 지혜롭고도 능력 있는 왕이시자, 우리를 자녀처럼 여기시는 아버지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과 충성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어떻게 우리의 삶이 무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도덕할 수 있고, 게으를 수 있고, 교만할 수 있고, 이기적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믿음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행함과 삶도 바꾸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구원받았다는 안심으로 끝나는 거짓된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삶과 행함을 드러내는 믿음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통로로 우리가 사용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