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죄에 관하여 (5) 고린도전서 15:45-49

따뜻한 진리 2024. 6. 2. 23:04

죄에 관하여 (5) 고전 15:45-4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가 거듭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양심적인 사람이어도 고작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만 부끄러워하고, 후회할 뿐 자신이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죄를 짓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하나님에 대한 죄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 하나님의 진노를 얻게 된 책임을 물려받았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끔찍한 죄인이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은 상태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심판과 지옥이 미뤄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즐겁게 살 수도 있고, 아담의 죄책 아래 있다는 것을 생각도 못하고, 회피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죄책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 아담의 죄책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러나 증거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책을 가진 채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으로 확인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 범죄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 죽음을 맞이했을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죽어가는 삶을 살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담만 죽은 것이 아니라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갑니다. 죽음과 함께 찾아온 모든 절망적 상태는 우리가 아담의 죄책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죄책을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증거입니다.

 

     사람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은 죽지 않아야 했습니다. 죽음은 사람 이외의 다른 생물들이 가진 운명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해서 영생을 확정받고, 안식의 상태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죄를 짓고 죽는 존재로 전락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자신보다 열등한 다른 피조물들처럼 된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신비하고 초월적이라는 뜻이기보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영적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다는 말은 단지 하나님이 몸이 없으시고, 유령처럼 보이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이 우주에 있는 어떤 것과도 하나님이 구별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영혼이 없는 세상 모든 것은 물질적입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하나님을 닮아서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의 영혼만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 몸도 영적입니다. 사람의 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표현기관,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몸도 죽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영혼이 없는 짐승과 유사한 육체적 존재로 추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로마서 8장 5절에서 8절을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어야 할 영적 존재가 이제는 그 죄의 유발자인 사탄을 드러내는 육신, 사람 자신의 욕심과 자랑을 위한 도구와 통로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이해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람이 죄 때문에 다른 동식물처럼 된 것 또는 그보다 비참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담의 타락 전후에 대해 말하는 창세기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종 들짐승과 새를 흙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저주를 예고하실 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단순히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이 썩어서 분해되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이나 아담이나 모두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아담은 특별히 하나님의 생기로,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흙으로만 만들어진 짐승들과 같은 수준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수치와 모욕을 겪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물론 타락한 사람이 죄 때문에 사람 이하의 다른 피조물, 돌, 나무, 짐승으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죄인인 사람은 여전히 지, 정,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이 일그러져있고, 그 형상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왜곡된 삶을 살기 때문에 비참한 것입니다. 다른 동식물들은 사람처럼 영적이지 않고, 인격과 도덕성을 갖지 않았지만 그러나 비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자기 역할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꽃과 물고기와 새와 들짐승들은 신비와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그들의 행동은 사람에게 교훈까지 줍니다. 잠언이 말하는대로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배워야 하고, 어떤 동물들은 부도덕한 사람보다 낫습니다. 동식물들은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많은 것들을 가졌고, 누리지만 비참합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어떤 생명체보다 가장 고귀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하나님께나 같은 사람들에게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에 비참한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꽃과 동물이 더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어느 피조물보다 복되어야 할 사람이 죄 때문에 자기보다 열등한 피조물을 사랑하고, 부러워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죄 때문에 영혼 자체를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영혼을 가졌으면서도 짐승과 같은 상태로 전락했기에 슬프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모욕과 수치를 겪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찾아온 죽음과 모욕은 아담과 그 후손인 우리가 함께 겪는 일입니다. 아담의 죄책이 우리 모두에게도 미치고 있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부모의 좋은 것을 물려받고 싶을 것입니다. 부모의 좋은 성품, 부모가 사는 동안 성실한 수고를 통해 모아 둔 재산을 물려받아 남들보다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고 무책임한 부모 때문에 어릴 때부터 고생을 하고,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빚을 물려받아 많이 고생해야 하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모를 두었다고 계속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진짜 불행한 것은 우리가 아담의 죄를 물려받아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그 죽음을 당연히 여기는 것, 심판과 영원한 지옥을 겪을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해 죄인임을 가르쳐 주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해결책을 알려주시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이 비극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모든 생명의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죄로 인해 겪게 되는 이 죽음, 사망을 당연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 대해, 죽음을 가져온 죄에 대해 분노해야 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듯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음을 통해 수고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얻지만 그렇지 않은 수많은 자들은 죽음 아래서 고통을 겪다가 죽음을 통해 영원한 지옥에 던져질 것이기에 우리는 죽음을 그저 반가워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악한 것이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셔야 했고, 부활하셨고, 우리에게도 부활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을 통해 여기 있는 모두가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길 원합니다.